[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잘라내고 싶어요.”

그가 무표정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수달 전 뇌경색으로 우측 두정엽 부근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었죠. 그의 왼팔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그는 그 부분을 자신의 신체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그다지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그 이상이었지요.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그의 왼팔을 증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의 신체에 대한 인식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마치 바위처럼 무표정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부인이 찾아와도 희미한 미소만 보일 뿐, 그는 예전처럼 반갑다는 제스처도, 사랑의 포옹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감동하게 있다가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격렬한 분노를 표현하여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하곤 했지요. 그가 잃은 것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친밀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감마저도 잃은 것이었습니다. 

 

우측 두정엽은 거리와 공간지각을 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부위는 우리 신체 중에서 어디까지가 자신인지를 정하죠. 어떤 뇌과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자신의 신체에 대한 주의력이나 친밀감의 문제로 보기도 합니다. 물론 그는 지식으로는 자신의 좌측 팔, 다리가 자신의 몸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는 평생을 함께 해온 자신의 신체 부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몸의 일부를 혐오하다 못해 이제는 잘라서 없애기를 원합니다. 그는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일부가 아닌 ‘기생충’으로 느끼는 듯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그의 팔을 잘라내는 대신 그를 재활의학과로 의뢰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잃어버린 자신의 팔에 다시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훈련을 받고, 거울을 이용하여 아직 친밀감이 남아있는 자신의 오른팔처럼 자신의 왼팔을 느끼게 하는 연습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손상이나 상실에 대한 고통을 느낄 때 그 고통의 강도는 대상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욱더 큽니다.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에서 수천명이 병으로 죽어간다는 뉴스를 볼 때보다 함께 사는 가족의 가벼운 감기에 우리는 더욱더 슬퍼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는 고통을 입는 대상과의 정서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 고통에 쉽게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일부로 느끼지 못하게 된 그 환자처럼 어느 날 우리가 타인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참혹한 결과를 영화 ‘기생충’은 보여줍니다. 
 

영화 <기생충> 中


사업에 연속으로 실패하여 돈과 직업을 잃은 가장 기택, 운동선수 출신의 그의 아내 충숙, 사수생 아들 기우, 그리고 미대 지망생 딸 기정은 반지하 집에서 궁핍하게 살아갑니다. 핸드폰과 와이파이가 끊겨 이웃집의 무료 와이파이에 매달리고 피자 상자를 접는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푼돈을 벌어 겨우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살고 있었죠.

어느 날 기우는 외국으로 유학을 나가는 친구 민혁의 부탁으로 본인이 과외를 맡고 있던 부잣집 박사장의 딸 다혜의 과외 대타를 제안받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인 기우는 기정이 위조해준 명문대 재학증명서를 가지고 면접을 보러 가고, 의외로 허술한 아름다운 안주인 연교는 기우의 언변에 넘어가 딸의 과외를 맡깁니다.

그리고, 이윽고 기우는 어렸을 적 귀신을 보고 나서 이상행동을 보이는 박사장의 아들 다송의 미술 과외 선생님으로 자신의 여동생 기정을 일리노이 주립대를 졸업한 ‘제시카’로 위장하여 박사장네 집으로 들이게 하고, 성공적으로 취직에 성공한 기정은 운전기사인 윤기사를 쫓아내고 대신 아버지 기택을 취직시킵니다. 마지막으로 기택은 오래된 가정부 문광을 결핵환자로 몰아 문광 대신 자신의 부인 충숙을 가정부로 취직시켜 마침내 전 가족이 서로 가족인 것을 숨기고 박사장네 집에 취직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봤을 때는 이 영화의 제목인 ‘기생충’이 부잣집을 숙주로 삼아 자신의 생계를 이어나가는 기택 가족을 의미한다고 여겼습니다. 아들 다송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캠핑을 떠난 박사장네 대신 마음대로 박사장의 대궐 같은 집을 차지하고 술판을 벌이는 기택의 가족들. 이들은 언젠가 박사장네 가족과 사돈을 맺어 이 풍족하고 선량한 집의 일원이 되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 순간 방문한 박사장네 옛 가정부 문광이 밝힌 놀라운 비밀은 상황을 급변하게 만듭니다. 사실 문광은 빚을 지고 사채업자에게 쫓겨다니던 자신의 남편 근세를 집주인도 모르는 지하 방공호에 숨겨두고 함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남편 근세를 지하실에서 이전처럼 살게 해 주고 이틀에 한 번, 아니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밥을 가져다주길 간절히 애원하는 문광의 부탁을 충숙은 거절합니다. 너와 나는 ‘같은 처지가 아니다’라고 차갑게 선을 그으면서요. 그 순간, 훔쳐보던 기택 가족들을 문광 가족이 목격하게 되면서 서로의 약점을 잡은 두 가족들은 누가 박사장의 집에서 지낼지를 놓고 혈투를 벌이고 그 과정에서 문광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끔찍하게 죽고 맙니다. 

 

그제야 우리는 ‘기생충’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을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세 가족들은 서로를 인간이 아니라 기생충으로 보고 있어요. 박사장네, 기택네, 문광네는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서 ‘인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이라 함은 자신의 가족들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가족들을 제외한 타인들은 이들에게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는, 즉 자신과 똑같이 맞으면 아프고, 굶으면 배고픈 동일한 감정을 느끼는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굶든, 죽든 상관없이 자신에게 필요한 기능만 존재하면 아무래도 상관없고, 자신에게 필요 없어지면 가차 없이 서로를 배제하려는 그런 기생충 같은 존재들로 보였던 것이죠.

반지하에 사는 기택네 가족에게 있어서 지하에 사는 문광의 가족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감을 유발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에 기생하는 기생충에게 징그러움 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요.

이 세 가족 사이를 유일하게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영화에서 단 하나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즉 냄새이죠. 내가 원하고 의도를 가지고 생각해서 발하는 신호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고, 어떤 환경에서 지내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내가 결코 원하지는 않았지만 떼어낼 수도 없는, 그러면서도 타인과 내가 전혀 다른 종이라는 것을 실감케 하는 동물적인 신호입니다. 그리고 박사장은 기택과 근세 모두의 냄새에 극심한 혐오를 느낍니다. 박사장의 찌푸린 얼굴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정적인 순간 기택에게 끔찍한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방아쇠가 됩니다. 
 

영화 <기생충> 中


동물 한 마리가 증오를 참지 못하고 다른 동물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이것은 동물의 본능이죠. 하지만 인간이 충동을 참지 못하고 다른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경우, 살인이라는 중죄가 됩니다. 그리고 그 벌로 그는 세상에서 격리가 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살인은 죄가 되고, 격리는 벌이라는 공식이 성립됩니다.

이것이 성립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타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입고 있는 옷 하나, 삼시세끼 먹고 있는 밥 한 그릇조차도 혼자서 만들 수 없죠. 수년째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조차도 일면식도 없는 농부가 키운 밀로 만든 라면을 먹고, 지구 반대편의 과학자들이 수십 년간 연구해온 컴퓨터로 만든 게임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이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우리의 신체가 팔과 다리, 머리가 분리되면 단 1분도 생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좋든 싫든 타인과 연결되며 관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이죠. 우리가 나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인간에게 특별한 감정과 신호를 느끼게 되는 것은요.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과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같은 인간이라는 종족 없이는 살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공포 영화의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끔찍한 일은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본능적으로 그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 아픔과 비통함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재생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상처 입히려고 할 때 그것이 곧 나의 일부를 상처 입히는 일이기에 한 번만 더 생각하도록. 주저하도록. 타인의 아픔을 어느 정도는 나의 아픔으로 느끼도록.

 

그런데 어느샌가 그 신호가 전달되지 않기 시작했어요.

박사장은 자신의 운전기사 기택의 코너링 솜씨에 흡족해하다가도 ‘부인을 사랑하시죠?’라며 대등한 인간끼리 주고받을 수 있는 사적인 문제를 기택이 끌고 나오자 이를 선을 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불쾌해합니다. 안주인 연교의 순진함은 충숙에게 있어서 인간적인 친절보다는 돈의 힘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숨어 사는 근세가 존경과 고마움의 표현으로 박사장이 계단을 지나갈 때마다 켜주는 센서등의 모스 부호는 존경의 표현이 아니라 센서의 고장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오직 냄새만이 서로의 선을 넘나듭니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전해주는 것은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혐오감뿐이죠.

자신의 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는 자신의 팔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증오심과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급기야는 잘라내고 싶어 하죠. 곁에 있는 이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인간이 아니라 벌레(蟲)라고 부르며 증오하기 시작합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한 자리에 모인 세 가족, 기택네, 박사장네 그리고 부인인 문광을 잃고 분노에 가득 찬 근세. 근세는 기택의 딸 기정을 칼로 찌르고 분노에 찬 충숙은 근세를 칼로 찌릅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자신의 딸을 보고 망연자실한 기택. 박사장은 죽어가는 기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발작을 일으킨 자신의 아들을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기택에게 열쇠를 던지라고 소리 지릅니다.

죽어가는 자신의 딸과 근세의 모습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대신 이들에게서 나는 냄새에 코를 막고 헛구역질을 하는 박사장에게 기택은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힙니다. 기택은 순간적으로 박사장의 가슴팍을 칼로 찌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간으로 느끼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의 죽음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한 지붕 아래에 한 몸과 같이 살았던 인간들의 사회가 무너져 내립니다. 
 


“이 영화는 악인이 없으면서도 비극이고, 광대가 없는데도 희극이다.”

- 봉준호

 

인간의 사회와 인간 사이의 단절을 가벼운 유머로 풍자한 영화의 시작과 달리 영화의 결말은 비극적입니다. 이것은 영화에서 순간순간 보여준 슬랩스틱 코미디에 실소를 터뜨렸던 우리를 무겁고 진지하게 만들어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던진 유머에 누군가가 평생 상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그런 느낌이죠.

영화에서 칼에 찔려 죽은 박사장은 타 영화에 나오는 극악무도한 부자 악역들처럼 타인을 짓밟고 올라선 악인이었나요?
남편을 살리기 위해 타인의 그림자에 기생하면서도 남편 먹을 음식은 자신의 급료로 마련하던 빈곤층 문광은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만큼 파렴치했나요?
자신들의 음모로 쫓겨난 누군가를 걱정하기까지 하던 소박한 가장 기택은 영화의 시작 부분이나 결말 부분에서도 그리 잔인한 성품을 가진 살인마였나요? 

 

우리는 모두 자신이 평가받을 때는 의도와 진심으로 이해받기를 원하죠. 그러나 타인을 평가할 때는 결과와 겉모습으로 이해해버립니다. 내가 타인을 상처 입힐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이유로 자위하고, 내가 상처 받을 때는 이렇게 선한 나를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그것을 피할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상처 입히는 길을 선택한 것처럼 여기고 증오하죠. 진심을 담은 신호는 전달되지 않고 냄새만이 전달되는 이 영화에서 묘사된 인간과 인간의 소통처럼요.

그리고 그 결과는 타인에 대한 증오와 아주 지독한 형벌과 같은 고독뿐이죠. 내 몸과 같은 공간에 밀접하게 붙어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신호를 보내며 꿈틀거리는 결코 공감할 수 없는 나와는 전혀 다른 생명체, 기생충. 오늘 당신은 누구를 기생충으로 봤고, 오늘 당신은 누구의 기생충이었나요?

우리는 모두 박사장이었고, 기택이었으며 또한 문광과 근세였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아이를 카페에 동반하여 민폐를 끼치는 아이 엄마를 경멸하면서도 저출산으로 인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죠. 텔레비전에 나오는 성공한 이들을 보며 그들이 뒤에서 저질렀을지도 모를 불법과 부정의 악취를 상상하고, 공원에서 자고 있는 노숙인들의 체취에 얼굴을 찌푸리며 그들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혐오하죠. 하지만 성공한 이들이 그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흘렸던 땀방울은 어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에게 먹일 음식을 마련하느라 흘렸던 땀방울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고, 길거리의 노숙인들은 나에게 불행과 불운이 연달아 일어날 경우 어쩌면 도달할지도 모르는 나의 슬픈 미래일 수도 있죠. 

 

물론 타인의 고통을 똑같이 느끼는 것은 불가능해요. 타인의 몸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고요. 우리의 정신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신을 우선하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하지만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내가 나의 팔을 나의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곳에는 나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나만큼 고민하고, 그들도 나만큼 슬퍼하고, 그들도 나만큼 아파한다는 것을.
때로는 이기적이고, 때로는 이타적이고 적당히 비겁하고 그러면서도 나쁜 일을 저지르면 벌을 받고 비난당할 것을 걱정하는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하에 영원히 갇혀버린 기택처럼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의 아픔 또한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까지 코를 막고 혐오하고 외롭게 아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당신도, 나도. 
 

사진_픽사베이


몇 달 만에 다시 본 환자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왼팔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는 종종 자신의 왼팔을 잊곤 하지만, 그는 이전보다 회복된 왼팔의 힘으로 단추도 잠글 수 있고, 바지도 혼자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그의 얼굴에 돌아온 친밀감의 표현이었습니다. 지속적인 왼팔의 훈련으로 자극된 그의 두정엽의 기능 일부분이 회복된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팔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자신의 신체에 대한 혐오감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강렬한 증오 또한 사라졌습니다. 그는 예전만큼 격렬하게 화를 내지도, 무감동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가족들에게 종종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하실에 갇혀 평생 나오지 않게 된 기택과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반지하집에 홀로 있게 된 기우를 생각하며, 그가 그렇게 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차트에 이렇게 적습니다.

misoplegia : 회복되어 가는 중임

*misoplegia : 자신의 신체 일부에 대하여 강한 혐오감을 갖게 되는 것. 주로 두정엽 손상시에 나타남.

 

타인의 감정과 입장을 생각하며 타인의 신호를 받아들이게 하는 공감은 정신과 진료실에만 있거나 아주 높은 도덕적 경지의 인간들만이 가지고 있는 고차원적인 어떤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이었죠. 곁에 있는 누군가를 이유 없이 꿈틀대는 기생충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 볼 수 있도록 말이죠.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지요. 같은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나의 일부처럼 생각하도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권순재의 <영화 속 마음을 읽다>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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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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