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40대 직장 여성입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반면, 좋은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게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상대에게 어떠한 기대감과 선입견이 없어서 말을 붙이기가 쉬운데, 친밀도가 쌓이게 되면 사소한 일에도 쉽게 서운하게 되고, 자존심이 상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학기 초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다른 친구와 더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면 질투가 생기고, 왠지 제가 버려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먼저 상대에게 다가가기보다 상대가 저에게 다가와야 자신감이 올라가고 뿌듯했습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에게 팔짱을 먼저 끼지도, 전화를 먼저 하지도, 먼저 만나서 놀자고 이야기하지도 못했습니다. 왠지 그런 태도는 저자세인 것 같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눈치를 많이 봅니다. 감정선이 남들보다 좀 발달한 거 같기도 한데, 가끔은 과하게 발동이 돼서 제가 먼저 지레짐작으로 상대의 감정을 판단하고, 서운해하거나 또 버려지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저는 표면적으로 무척 당차고 쿨할 것 같은 이미지인지라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까지 고민을 하는 걸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서 더 쿨한 척하기도 했고, 저 역시도 상대로 인해 제가 영향을 받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별일 없는 척 넘어간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남자관계에서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지금의 신랑도 그렇지만, 이전에 교제하거나 혹은 잠시 만났던 이성들과의 관계에서는 이별에 대한 불안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성 관계에서 저에게 중요한 건 상대와 내가 시너지가 날 수 있는 관계이냐였지, 상대의 변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관계가 망가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 일도 없었지만, 설령 상대가 내가 싫어서 떠나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성과의 관계는 매우 안정적이었습니다.

 

부모님을 잠시 언급하자면, 아버지는 전형적인 딸 바보이십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저에게 무한애정과 무한긍정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딸은 무엇을 해도 잘할 것이다, 예쁘다, 좋다 등등...

하지만, 어머니에게 저는 늘 기대에 못 미치는 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저를 주위의 친구들과 비교했습니다. 외모, 성적, 성격, 태도... 90점을 맞아도 95점 맞은 친구보다 못하다고 혼이 났으며,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혼이 났고, 여성스럽게 웃지 않는다고 핀잔을 들었으며, 성격이 드세다고 지적을 당했습니다.

어머니는 결혼 당시 아버지의 일방적인 구애로 결혼이 성사됐다며, 아버지를 늘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와 외모와 성격이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엄마는 결혼생활 내내 아버지의 모든 것을 못마땅해했습니다. 아버지의 외모, 성격, 사고방식... 큰딸인 제게 늘 아버지를 험담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빠를 똑 닮았다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을 닮은 남동생에게만은 한없는 애정을 부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동생과 저는 정서적으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기 위해서 향수를 뿌린다면 제 남동생은 자신이 기분 좋기 위해서 향수를 뿌립니다. 저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중요하다면 동생은 자신의 판단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래서 동생은 인간관계에서도 담백하고,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이 40이 넘어서도 여전히 비슷한 자리에서 넘어집니다.

 

하지만, 직장에 들어간 이후에는, 직장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에서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다시 어릴 적 상처가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직장에서 관리자급에 있으며, 여자 직원들 중에서는 최고참입니다. 그래서 제 나름 밑에 직원들 서열 관리도 그렇고 잘 챙겨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직원들은 저를 어려워하고 불편해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회사에서 물론 연차가 있는 것만큼 일도 많고, 밑에 직원들처럼 가볍게 행동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기 때문에 언행을 많이 자제하고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직원들이 저를 어려워하고 불편해하면 저는 또 어릴 때처럼 버려질까 봐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저는 꼰대 기질도 있는 것 같고, 꼰대 기질이 있는 것만큼 윗사람으로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업무량에 대해서도 불평 없이 소화하고, 무게감 있게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두려움이 다시 올라오는 걸 보니 제가 너무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살면서 저를 외롭게 만드는 거 아닌가... 아니면 이게 직장에서 직급을 달고 위로 올라갈수록 당연한 현상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답변)

긴 글에서 그동안의 어려움과 깊은 고민이 느껴지네요. 

정리를 좀 해보겠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그리 원치 않는 결혼을 하셨고, 아버지를 닮은 질문자분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질문자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이미 친해진 친구들이 다른 사람에게 떠나갈 것 같은 불안을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본인이 아니라 남동생에게 가는 경험을 이미 집에서 하셨으니까요. 또 나란 존재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실 수 없었던 것 같네요. 내가 먼저 다가갔을 때 거절당하면, 그 상처가 가만히 있었던 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죠. 

내가 사랑받을 만하지 않다는 믿음 때문에, 관계가 늘 불안하고, 그 불안한 관계를 조절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감정 변화에 집중해야만 하셨을 겁니다. 상대방이 떠나는 신호를 빠르게 알아차리고 처음에는 붙잡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그냥 먼저 밀어내 버립니다. 그게 내 마음의 상처는 덜 날 테니까요. 가끔은 상대방의 감정을 과하게 예측하다 보면, 실제로 관계가 틀어지는 일도 생겼을 테지요. 

 

더 가슴 아픈 것은, 표면적으로 쿨한 척하는 면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정말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전혀 쿨하지 않습니다. 굳이 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에요. 내가 엉망진창이 모습을 보여도 저 사람이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실제로 가슴이 아픈데도, 모든 사람 앞에서 쿨하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실제로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 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그나마 곁에 있는 다른 상대방이 떠날 거라 예상도 하시겠죠. 

그래서 사실은 질문자분이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강하게 믿을수록 사람에 대한 분노는 커집니다. 왜냐하면, 질문자분 마음속에서 사람이란 내 작은 실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를 곧 떠나버릴 비겁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질문자분에게 충분한 사랑을 해 주신 덕에, 남성은 질문자분의 분노를 받지 않게 됐고, 그 덕에 남성과의 관계는 비교적 수월해진 듯합니다. 반면에 여성은 질문자분의 분노를 그대로 받았을 것이고, 이 분노는 관계를 오래 끌고 가는데 방해가 됐을 것 같네요.

 

질문자분이 직장에서 관리자급이 되면서 생기면서 어릴 적 상처가 다시 생각난 이유는, 직장에서는 이제 질문자분이 어머니의 위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직장의 관리자급은 부모님 같은 존재입니다. 여자 직원 중에서 최고참이시니, 당연히 어머니 같은 존재시겠죠. 질문자분에게 어머니란 따뜻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어린 시절 차가운 어머니에게 질문자 분도 당연히 화가 났을 테지요. 그렇기 때문에, 현재 직장에서 본인에게, 아래 직원들이 마음속으로 분노하고 있을 거라 예상하실 겁니다. 그들이 질문자분에게 웃으며 얘기를 해도, 마음속으로는 질문자분을 욕하는 게 아닌지 걱정되실 수도 있죠. 어린 시절 질문자 분도 함께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을 테고,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여러 번 버리셨을 겁니다.

 

또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본인이 관리자급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 같은 언행을 했을 수밖에 없으셨을 겁니다. 자신을 상처 줬던 차가운 어머니로 본인이 변해버리는 경험을 하신 거죠. 내가 원망하는 대상이 내 안에도 있다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직장은 승진할수록 외로워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고, 업무 특성상 그럴 수 없는 경우도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직장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보충하곤 합니다. 그래서 현재 가정은 평안하신지가 걱정이 되네요.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질문자분이 어머니와 어떤 점이 비슷하고, 어떤 점이 다른지를 적어보시는 게 도움이 될 듯합니다. 현재 직위 때문에 본인을 어린 시절 어머니와 혼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만약 이 예상이 맞다면, 어머니와 비슷한 점은 쉽게 적을 수 있지만, 다른 점은 찾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럴 때는 본인과 아버지가 닮은 점을 먼저 적으시고, 어머니와 비교를 해 보시길 바랍니다. 어머니와의 차이를 찾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겁니다. 

그리고 여유가 되신다면, 상담 가능한 정신과 의원을 방문하셔서 정신치료를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는 질문자분이 써준 글로만 상황을 보고 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직접 방문하셔서 상담하신다면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고,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은 질문자분이 평온한 생활을 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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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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