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사연) 

안녕하세요, 익명이라기에 한번 끄적여봅니다.

저는 정신과에서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받은 이력이 있습니다. 불면증과 삶에 대한 무기력증,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해 말이죠. 하지만 왜 그렇게 돼야만 했는지에 대한 사건은 말하지 못했습니다. 제 입으로는 차마 말을 하기 힘들더군요. 하지만 이곳에서라면 말할 수 있을까 싶어 꺼내봅니다.

저는 20대 초반 여자입니다. 저는 중학생 때 친한 남자인 친구들한테 생일날 술을 마시고 집단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술에 취해 기억이 전혀 나질 않지만 얼마 뒤 친구에게 전해 들어서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자해를 시도했어요. 죽기는 무섭지만 제가 너무 싫었으니까요.

그 후 고등학생 때, 연예인이라는 꿈을 가지고 들어간 소속사에서 또 한 번의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약을 먹인 건지 기억이 나질 않았어요. 도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 휴대폰만 들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 몸으로 그곳을 뛰쳐나와 옆 어두운 주차장에 숨어서 지인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당시 미성년자였고 부모님께 알려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렇게 며칠을 울며 밤을 새우다 결국 신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실이 퍼져나간 건지 저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에 기사까지 났더군요. 꽃뱀이라는 둥, 어리석다는 둥, 조심성이 없었다는 둥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보고 충격에 받아 자책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끝없는 자살시도를 하였지만 결국은 이렇게 살아있네요. 저를 살린 지인들이 미웠지만 뭐 어쩌겠어요..

그리고 잊으려 노력하며 살아가던 도중 판결이 났는데, 증거불충분이라며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더군요. 소속사에서 돈을 먹인 건지 경찰은 건물 CCTV조차 기록이 지워진 후에 찾으러 갔으니 말이죠. 저는 그로 인해 세상이 한번 더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제 몸을 망가뜨려가며 죽음을 바라 왔어요. 몇 년 동안 바라고 바라고 바라다 친구들의 부탁으로 병원을 갔고, 극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이라는 판단을 받아 약을 먹었습니다. 정밀검사를 요구했지만 제겐 여건이 되질 않아 비싼 비용을 주고 검사를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약을 끊고 잘 지내보려 하고 있어요. 혼자가 되면 몰려오는 충동을 남자 친구도 알고 있어서 절 하루도 절 혼자 두지 않아요. 물론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지만요. 그 사람 덕분에 잠도 잘 자고 하는데, 이 사람이 늦게 들어오는 날에 혼자 집 안에, 방 안에 있으면 또다시 우울함과 불안함이 밀려들어와요. 그 소름 돋는 기분들이 저를 잠식해서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아 너무 두려워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그 사실이 두려운 것 같아요.

이전의 제 상처들도 치료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을 안식처로 삼은 건 실수일까요. 그리고 연인이라면 언제든 끝날 수 있는 관계인데 끝나게 되면 저는 또 어떡해야 할까요. 그리고 이전의 상처 때문에 아직도 간간히 죽고 싶어 지는 건 어쩔 수 없는데 약을 먹어야 할까요.

세상에 기대도 재미도 희망도 무엇도 남아있질 않아요. 제가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조차 모르겠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기회만 된다면 죽고 싶어요. 이미 손목은 흉터가 너무 짙게 남아있고 속은 약 때문에 뭉개져버렸고, 저는 저를 너무나도 증오해요. 저는 제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원래 작년 크리스마스에 죽으려 계획했었는데 우연히 현재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어 계획이 틀어졌어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보는 중인데 그런 와중에도 죽음을 바라는 제가 너무 싫어서 여쭤봅니다. 전 어떡해야 할까요...? 
 

사진_픽사베이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정희주입니다.

두 번의 안 좋은 경험을 하고 나서 우울증, 불면증 증상이 생기고, 자살시도도 여러 번 하시면서 여기까지 오셨네요.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을지 저로서는 온전히 알 수 없겠으나, 일단은 그동안 너무 고생이 많으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글쓴이 분이 겪은 일들은 단순히 안 좋은 경험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트라우마 혹은 외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경험이며, 그것도 두 차례나 유사한 일을 겪으셨습니다. 외상에도 종류가 있는데 가까운 지인, 믿고 의지하는 관계에서 발생한 경우에는 애착외상이라고 하며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안 좋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일단 이러한 외상을 겪게 되면 그 일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에 대한 불신, 자기혐오가 쌓이고 심하면 자살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한편으로는 내 주변, 인간관계에 대한 불신이 생겨서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겹쳐지고 반복된다면 자연스럽게 우울증이 생기고 불안, 분노 등의 감정이 자신을 집어삼키기도 하고요.

 

일단 구체적인 자살계획, 자살생각이 있다면 하루속히 병원에 가서 솔직히 털어놓고 입원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정신과적 응급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단은 급한 불을 끄고 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 이후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남의 조언이나 나의 의지가 아닌 경험으로써 가능합니다. 안정적이고 환경에서 지지적인 대인관계를 반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세상에 대한 믿음이 다시 생기게 됩니다. 자신의 삶에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할 때 자기혐오가 누그러들고,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 작은 행복을 느끼는 경험이 반복될 때 세상은 살만하다는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하게 됩니다.

글쓴이분께서는 반복적으로 트라우마를 겪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고, 심리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기도 하였으며, 힘든 마음 상태에도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맺으셨습니다. 나는 분명 대단한 성취를 했다는 것, 힘겹게 여기까지 살아남아 온 자신이 대견하다는 것을 조금만 인정해준다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약간의 자기긍정을 바탕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굳건히 살아나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살피려는 노력을 하기, 그리고 작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의식적으로’ 목표에 대해 보상하기. 중요한 내용을 많이 배워갑니다!"
    "근육을 키운다는 느낌으로 조금씩 실천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정희주 전문의의 대표칼럼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