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네이버에서 글을 보다 우연히 알게 되어 답답한 마음에 글 남깁니다.

그 전의 히스토리를 짧게 이야기하자면, 저는 10여 년 정도 가벼운 우울증을 갖고 있습니다. 추운 계절에 더 심해지곤 해서 계절성 우울증이라고 예전에 다녔던 병원 선생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이후 심리상담사님과 2달 정도 상담하면서 지금은 약이 없어도 우울감을 느끼면 혼자 잘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마음 근육을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끔 키운 근육도 소용없을 정도로 우울감에 빠지긴 하지만 그래도 심하면 저 자신을 방치하지 않고 상담이나 다른 노력들을 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직장상사 한 분이 저를 망신 주듯 이야기를 하고 난 후부터 제 상태가 많이 이상합니다.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을 때 제가 예전부터 미리 잡아두었던 휴가가 있어서 그전에 제가 맡은 파트를 미리 끝내고 일찍 컨펌 요청을 드렸습니다. 근데 본인이 바쁘다고 컨펌을 안 내주시더니 결국 휴가지에 있는 저에게 밤늦게 전화해서 수정을 요청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휴가를 다녀 온 후 회의 시간에 구성원들 앞에서 제가 일을 못한다는 듯이 망신 주듯 하시는 말을 듣고 그때까지 잘 감추도 있던 제 포커페이스가 무너졌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 일을 제가 화를 내며 친하게 지내는 다른 직장상사분에게 말했더니 그건 그 상사가 잘못했다고 달래주시더라고요. 제 편을 들어주니 화는 좀 가라앉았지만... 그날 밤새 제가 일을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이후에 다른 동료들의 위로로 일이 잘 마무리됐다 싶었는데.... 오늘 팀원들과 업무 중에 부딪힌 일로 화와 짜증이 난 게 퇴근을 해서도 가라앉지 않습니다. 업무 협조 및 요청을 했는데 팀원이 큰 문제 아니니 그냥 넘기면 안 되냐고 하더군요. 전 그런 사소한 것이 쌓여 우리의 평판이 되는 거라고 말을 했고 상대방은 자기를 가르치지 말라고 받아쳤습니다. 그 말에 화가 났습니다. 

그 팀원은 지난번에도 저와 두어 번 업무적으로 작은 언쟁이 있었던 직원이고 그때도 그런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제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저의 그동안의 업무 프로세스를 말하는 게 뭘 그렇게 가르치는 걸까요? 의견이 다르면 '아 그러냐, 근데 나는 이런 의견이다'라고 말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비단 이번 일뿐만 아니라 한 번 짜증과 화가 나면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업무적인 일이든 가족과의 일이든 짜증이나 화가 나면 가라앉지도 않고 누가 말을 시키는 것도 싫도 그냥 나를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습니다

친구나 누구랑 이야기할 때 잠깐 가라앉았다가 또 혼자가 되면 화나고 짜증 나는 감정이 이어집니다. 심할 땐 속으로 욕설도 되뇌고요.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걸까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두형입니다.

최근 일련의 일들로 마음이 너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우선 고생하신 마음에 대한 위로의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예전에 사회생활에서 갈등을 겪을 때, ‘차라리 usb 포트를 꽂듯 서로의 마음을 연결할 수 있다면 오해가 없을까?’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데, 이내 ‘그렇다 하더라도 갈등이 이어질 수 밖에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서로 갈등을 빚고 오해하는 이유는 나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서로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너무도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사회적인 관계의 경우,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관계들, 예를 들어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관계들과는 특별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관계의 기반이 ‘이해관계’라는 것입니다. 즉, 원초적인 혈연으로 묶인 가족관계나 친밀감, 서로에 대한 호감을 바탕으로 지속되는 친구 관계와는 달리 직장 동료, 상사와 부하직원, 선후배 같은 사회적 관계는 기본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혹은 어떠한 목표나 성과를 공유하기 때문에 맺어진 관계입니다. 물론 사회적 관계에서도 친구나 가족 이상의 친밀함을 나누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사회적 관계의 본질은 아닙니다.

앞서의 이야기를 통해 드리고 싶은 메시지는 ‘관계는 다른 삶을 살아가며 다른 가치관을 가진 두 사람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일이기에 기본적으로 갈등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과 ‘특히 서로에 대한 호감, 친밀감이 아닌 이해관계를 전제로 만나는 사회적 관계는 그러한 갈등의 소지가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글쓴이님이 겪으신 일들, 정도나 세밀한 내용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를 비롯하여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십분 공감할 만한 어려움이라는 말씀을 우선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글쓴이님이 말씀 주신 것처럼 그러한 갈등을 유독 견디기 힘들고, 엎친 데 덮친 것처럼 문제가 이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나의 마음을 한 번쯤 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일관되고 객관적인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인식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감정에 매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평소라면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갈 만한 일도, 속상하거나 상대방에게 미리 감정이 있는 상태라면 잘 넘어가지 못하고 울컥 화를 냈던 경험은 아마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불편하고 스트레스가 많거나, 관계 대상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미리 느끼고 있었던 상태라면 작은 일에도 쉽게 화가 나고, 반대로 내 마음이 편안하고 상대방에게 호감이 있었던 상태라면 비록 상대가 큰 실수를 하더라도 너그러이 넘길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부정적이니 무조건 참아야 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전과 달리 최근에 내가 유독 화를 내는 일이 잦아지거나, 불편한 상황을 참고 넘어가는 것이 힘드시다면 ‘최근에 내 마음이 다시금 우울하거나 힘든 건 아닐까?’ 하고 돌아보시는 계기로 삼으실 수는 있겠습니다. 또한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만 들어 화가 난다면,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시점에서 ‘혹시 최근에 내 마음의 여유가 많이 없어서, 상황을 더 안 좋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잠깐 되돌아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또한 주체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올 때는 이것이 내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온 감정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오해와 다툼을 누구나 겪게 마련이고, 화를 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 상황에 비해 지나친 분노, 스스로 주체하기도 힘들고 ‘이 정도까지 속상해야 하나?’라고 생각이 드는 감정은, 지금 이 상황 자체뿐 아니라 나의 과거의 상처나 마음속 깊은 생각이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 스스로가 무능한 건 아닌지 고민이 많다면 ‘일을 좀 잘해.’라는 뉘앙스의 말을 들었을 때 지나치게 화가 날 수 있고, 사람과의 관계가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 늘 속상하고 가슴 아팠던 사람이라면 ‘저 사람은 잘 지내기 힘들다.’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깊은 슬픔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의 근원을 알아내고 교정하려는 시도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로 화가 나는 상황이나 패턴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고, ‘아, 나는 이러한 상황이나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잘 화가 나는구나.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는 바로 화를 내지 않고 시간을 벌도록 조심하고 주의해야겠다.’라 알아차리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감정이란 꼭 어떤 행동, 이를 테면 화를 내는 행동 같은 결과가 있어야지만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감정을 읽어내다 보면, 화를 내어야 할 것만 같은 충동도 서서히 줄어갈 것입니다.

 

저는 면담할 때 ‘마음의 속도를 조금만 늦춰 보세요.’라는 말씀을 많이 드립니다. 우리의 마음은 평소 자동적으로 흘러가는 패턴에 따라 쉽게 상황을 판단하고, 내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상황에 대한 감정과 행동을 결정해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화를 낸다.’라는 행동으로 이어지기 전에 상황과 감정을 조금만 찬찬히 되돌아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최근의 감정이 주는 영향, 혹은 지금 상황이 아닌 나의 과거의 일과 그때의 속상함이 주는 영향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참기 어려운 분노, 지나친 슬픔 등이 밀려올 때는, 그에 따른 어떤 행동을 바로 행하는 대신 ‘아, 지금 내 마음에 화가 많이 나는구나.’라고 그 마음 자체를 알아차리고, ‘그런데 이 상황이 이 정도의 감정을 느낄 만한 상황일까? 혹시 내 원래 마음이나 최근의 힘든 것들이 이런 감정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까?’라고, 조금만 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되돌아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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