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강남 푸른 정신과, 신재현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입니다.

저에게는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제가 있어요. 마치 제가 하는 생각들이 피해망상 같아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 아마도 '사촌들이 놀러 와서 날 반기지 않았다'고 느껴서 엉엉 울었던 것 같아요. 당연히, 나중에 놀러 온 손님을 마중 나가 맞이하는 게 맞는 건데, 저는 왜 그때 위와 같은 행동을 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 이후로, 저 혼자 이상한 피해망상에 빠진 건지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명절 때마다 사촌들이 놀러 오면 괜히 잘 섞이지 못하고 항상 동떨어져 있고, 어울리지 못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또 그 행동에 대해서 굉장히 불쾌감을 느끼고 내가 은따, 무시를 당하는 것 같고 수치스럽고, 상대방이 날 무시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매사 자신감이 없고, 자존감이 낮고, 수동적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든, 학교에서든 처음에 누군갈 만나면 잘 지내다 시간이 갈수록 직장 상사가 다른 동기만 예뻐한다고 혼자 생각하게 되고, 자꾸 그렇다고 인식을 하며 저 혼자 그 사람을 멀리합니다. 그리고 예쁨 받는다고 생각되는 동기와 잘 지내는 사람들까지 정말 짜증 나고, 잘 지내는 게 보기가 싫습니다. 역시나 그 주위 사람들에게까지도 거리를 두게 돼요. 

첫인상이 착실하고 착했으며, 잘 놀던 사람이 어느 순간 거리를 두고 돌변해버리니 상대방은 당황스러워하고 저를 되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해요.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되면서 서서히 멀어집니다. 그러면 저는 또 '왜 나한테 다가오지 않는 거지? 나를 꼽주려는 나쁜 사람들이야', 하고 생각하면서 저 혼자 스트레스받고 피해망상에 빠져요.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고, 결국 고립되지요. 

 

제 외모에도 너무 자신이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덩치가 컸던 저와 반대로 왜소하지만 딱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몸매와 얼굴을 갖고 있는 친언니와 비교를 많이 당했어요. 면전에 대고 얼굴이 못생겼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지만 알게 모르게 비교당하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친언니를 보면 "아이구~ 왜케 귀엽게 생겼어? 예쁘게 생겼네?" 그 옆에 있는 저를 보면 "동생이야? 언니 같다 얘~ 언니처럼 생겼네~ 착하게 생겼네" 하고 끝. 모든 가족들이 언제부터인지 언니만 예뻐하는 것으로 보였고 저는 또 그렇게 친척들을 무례한 사람이라 치부하고 결국 또 멀리하고, 차갑게 대하는 둥 예의 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어요.

 

또, 조금이라도 지적을 당하면 금방 풀이 죽고 다시 일어설 생각을 안 해요. 엄청 큰 잘못이 아니고 자잘하게 실수했을 땐 "죄송합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하고 "다시 잘해봐야지." 해야 하는데, 지적 등을 몇 번 받으면 그대로 풀이 죽어서 뭘 더 잘해보려고 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요.

저는 어릴 때 가정불화도 많이 겪었고(아빠 폭력 등),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클 수 있게 도움을 주지 못한 부모님 문제, 어렸을 때부터 저를 무시하기만 바빴던 친언니 문제 등 여러 요인이 얽히고설켜 있는 듯한 느낌이에요. 이 때문일까요? 

현 직장에서도 위에서 말씀드린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어서 문제예요. 입사 초기에는 잘 지냈는데 많은 업무량 + 업무 지적+ 동기나 다른 사람들만 예뻐한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정말 마음 편하게 회사 생활을 못하고 있어요. 또 눈치 보고 자존감 하락에, 자존심만 높고, 회사 사람들이랑 어울리지도 않고 임원분들 무시하는 등의 행동을 보입니다. 피해망상인 건지, 우울증인 건지, 피해망상 또는 우울증이라면 중증도가 어느 정도인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알고 싶어요. 

그리고 거진 20년 동안 겪었는데 병원 몇 번 다니고, 약 몇 번 먹는다고 나아질 거라고 생각은 안 해요. 다만 저 자신 좀 그만 괴롭히고, 남들 그만 괴롭히고.. 정말 편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해결책이 있을까요?

선생님, 답변 부탁드려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 대표원장 신재현입니다.

오랫동안 얼마나 외로우셨을지, 질문자님의 절박한 심정이 글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저는 질문자님의 글에 어떤 특정 진단을 붙이기보다, 말씀하신 고통의 근간에 자리 잡은 낮은 자존감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타인에 대한 불쾌감, 혐오감,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들의 바탕에는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상처 받은 자신이 있는 법이니까요. 낮은 자존감은 ‘내가 부족하고 결핍된 사람’이라는 부정적 자기인식에 기인합니다. 질문자님께서 피해망상이라 칭한 증상 또한 이 때문으로 보입니다. 

 

# 나는 부족한 사람? 

어린아이에게 매일 ‘바보, 멍청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아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분명 그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본질적으로 그 아이가 부족한지와는 크게 상관이 없이, 아이는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개념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장 과정의 경험은 이렇듯 중요합니다. 자신이 자라왔던 환경이 자신을 무엇인가 부족하고 결핍된 사람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환경이라면, 자신의 마음 안에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원래 부족한 사람이야’라는 자기 인식과, ‘내가 습관적으로 나를 부족한 사람을 보고 있었구나’ 하는 인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질문자님의 상처와 무시로 얼룩진 성장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어느 순간 학습되었을 테고, 이후부터는 이러한 인식이 부정적 생각, 느낌,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부정적 행동들을 만들어내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확대 재생산된 부정적 인식들은 한 바퀴 돌아 원래의 자기인식을 더 부정적으로 강화하게 되었을 테고요. ‘역시 나는 부족한 사람이 맞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문자님이 애초부터 부족한 사람일까요? 낮은 자존감은 오랜 시간을 거쳐 마음속에 자리 잡은 습관과 같아요. 

 

# 낮은 자존감 = 학습된 습관 

이러한 자기인식을 사실이 아닌 <학습된 습관>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를테면 나쁜 버릇과 같은 거예요. 원치는 않지만 많은 상황에서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버릇들 말이지요.

나쁜 버릇은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오랜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순간순간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타인의 말과 행동에 과민반응하는 나 자신의 마음속에 자동적으로, 팝업창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을 인식하는 것이지요.

오랫동안 갇혀있던 생각의 틀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생각이 결국 지나갈 수 있는 것임을, 그렇기에 굳이 그 생각에 빠져 허우적댈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 알아차림, ‘잠시 멈춤’ 버튼 누르기 

알아차림은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르는 행동과 같아요. 타인의 말에 대해 질문자님의 ‘피해망상’이 발동하는 순간, 이전의 패턴으로 빠져들어가는 순간, 멈춤 버튼을 누르고 자신의 마음속에 지나가는 생각들을 알아차리고 거리를 둘 수 있다면 자동적으로 나타났던 타인에 대한 적개심과 반감 또한 그 의미가 옅어질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의식적으로 연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알아차림을 연습하는 유용한 방법 중 하나는 ‘기록하기’입니다.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순간 스마트폰 메모장에 이를 기록하거나, 매일 자기 전 하루 중 인상적이었던 순간(마음이 요동치는 순간)을 일기로 기록하는 것, 어떤 방법이든 좋아요.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머리 안에 들어있는 생각, 감정을 끄집어내 눈 앞에 펼쳐놓는 것이지요. 즉, 내 생각에 물리적인 거리를 두고 고민할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리는 힘이 커진다면, 피해망상이 나타나는 순간 또한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거리를 두고 잠시 멈출 수 있게 됩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다음 단계는 나쁜 버릇을 대체할 수 있는 건강한 행동들을 반복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이전에는 타인에게 화를 내거나, 반감을 드러내고, 혹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행동을 선택했었다면 자신의 생각에 숨어있는 왜곡된 인식을 살피고,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낡고 망가진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좀 더 건강한 행동 패턴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현재 질문자님께서 안고 있는 고민에는 일시적인 약물치료나 짧은 기간의 상담보다 긴 호흡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꽤 긴 기간 동안 쌓여온 찌꺼기들을 없애는 데는 혼자의 노력으로는 힘들 수 있어요. 함께 노력할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질문자님의 고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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