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의 아이 둘이 있어요. 결혼하면서 남편 연고지로 오게 됐는데 남편은 일 때문에 타지로 가게 되었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여기서 시모를 모시며 10년 가까이 주말부부 생활을 했어요.

혼자 애 둘 키우고... 심한 조울증이 있으신 시모도 혼자 모시고...

남편의 형제자매도 많은데, 아무도 안 도와주더라고요. 혼자 애 둘 업고 안고, 심한 조울증 있으신 시모도 모시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라 매일매일 돈 걱정.

첨엔 남편한테 도와달라고도 말도 해봤는데 남편은 그냥 흘려들었고, 미웠지만 타지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하고 애들 보며 살았어요.

 

그러다 남편이 갑자기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오게 됐어요. 제 편이 온다니... 경제적 여유는 더 없어졌지만 그래도 애들도 크고 남편이 있으니 저도 직장생활을 하면 어찌어찌 살아지겠다 했지요. 

하지만 순전히 제 착각이었어요. 주말부부 하면서 남편이 썼던 카드 값은 눈덩이가 돼서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고... 남편이 비정규직 일을 새로 시작했는데 세금은 더 늘어났고... 애들은 점점 커가고... 숨이 막히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는 와중에 시모가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벌써 몇 차례나 수술을 받았네요. 비용도 다 저희가 냈고요. 저도 일 다니면서 시어머니 병간호에, 애들 등하교에, 집안일에 혼자 다 했어요.

정말 남편은 자기가 벗은 양말 하나도 정리 못 하는 사람이에요. 한밤중에 시모 아프셔서 큰 병원까지 한 시간 거리를 제가 구급차 따라다니며 병간호했고요. 남편은 여태 엄마를 제가 모셨으니 제가 더 잘 알 거니깐 제가 병간호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집에서 애들 밥도 숙제도 안 챙기고, 자기 입은 옷도 방바닥에 밟고 다니고, 밤새 병간호하고 집에 들어가면 온통 어질러진 집 보면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그러다 사건이 있었어요. 입원하신 시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남편은 묵묵부답. 대답을 안 하더라고요. 원래 평소에도 의논이 안 돼요. 물어보면 피드백이 전혀 없어요. 그놈의 생각한다고. 그놈의 생각 죽을 때까지 하다 죽을 때 대답해주려는지... 그래서 그날은 저도 화가 좀 났지요. 긴 병간호에 제가 지쳐 있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화를 내서 기분이 상했는지 남편은 괜히 반려견에게 성질을 내더라고요. 밥을 안 먹는다며 트집 잡아서 때렸어요. 아빠 그런 모습에 애들도 울고... (원래 손버릇이 있는 사람이에요.. 반려견 폭행도 한두 번이 아니지요.) 그때 반려견이 맞은 데가 아팠는지 낑낑거리더라고요. 그 소리가 거슬렸던지 이제 작대기를 들고 그 개를 때리겠다고 덤비더라고요. 너무 화가 났지만 애들이 겁에 질려있어서... 일단 애 아빠만 말리고 강아지는 방에 데려다 놓고 문을 닫아버렸어요. 

입원한 시모 병문안도 할 겸 애들 바람도 쐬어 줄 겸 외출 준비하는 동안 말을 한마디도 안 했지요. 외출 준비가 끝나고 애들 보고 아빠는 준비 안 하냐 물어봐라 했는데 그 뒤로 어마어마한 욕이 날아오더라고요. 

무시하냐고... 왜 외출한다고 말을 안 하냐고, 왜 엄마 병원 간다고 말을 안 하냐고... 자기는 애들 데리고 놀러 갈 것만 생각했다고.

어이가 없었어요. 엄마가 병원에 있는데 병간호는 당연한 일인데...

그래서 처음으로 애들 데리고 집을 나갔어요. 친정으로. 근데 그것도 애 아빠는 어이가 없대요. 이게 거기까지 갈 일이냐고. 다시 집으로 와서도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었어요.

 

그 뒤로는 제가 질렸나 봐요. 애 아빠 보면 말이 없어져요. 표정도 없어지고... 그게 점점 심해지다 보니 이제 집 생각만 해도 얼굴이 굳어요. 이혼하고 싶은데, 그래도 애들 생각에 한 번 더 노력해보자 싶어서 애 아빠랑 진지하게 이런 이야길 했어요. 나 요즘 너무 마음이 힘들다 이제 더 이렇게 살기가 싫다고요. 남편은 어떻게 해주라는 말이냐고만... 미안하고 고마운데 이제 그런 말도 형식적이고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 그 말만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별말 없이 잠자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니 애들은 놀이터에 있고 애 아빠는 또 강아지를 잡고 있더라고요.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화난다고 자긴 머 좋아서 이러고 사냐고 왜 안 웃냐고 화내고는 집을 나가데요. 그날 정확히 알았어요. 이 사람 노력 안 되는구나.. 내 말 안 듣는구나.. 힘든 거 고생하는 거 안다더니 아~ 하나도 모르는구나.. 이 사람은 안 되는 사람이구나.

그다음 날은 그날 그런 일이 미안한지 저녁 준비를 도와줬어요. 근데 그게 고맙다는 생각이 정말 하나도 안 들었어요. 오히려 저 사람 왜 저러지...

이제 점점 더 이혼하고 싶다는 생각만 들어요. 애들이고 뭐고... 애들도 다 버리고 도망갈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하루하루 집이 너무 고통이에요. 어쩌면 좋나요, 저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재옥입니다. 

남편의 배우자로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어머니로서 살아오신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말씀해주신 내용들 중에 함께 고민해야 할 내용이 워낙 많은데, 그중에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 하나에 대해서만 얘기해볼까 합니다. 

바로 남편분의 폭력성향입니다. 

어떤 가족이더라도 어느 정도의 폭력은 존재합니다. 가벼운 언어폭력부터, 범죄에 가까운 수준의 신체폭력까지. 하지만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보통은 실제보다 덜하게 표현하곤 하죠. 왜냐하면 가해자도 일단 가족이니까요. 그래서 가정폭력에 대해 상담할 때는, 현실에 가까운 가정폭력 상황을 추측해가며 듣곤 합니다.

실제로 신체폭력이 있는 경우는 당연히 심각한 상황이지만, ‘자녀가 함께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언어폭력’이나 ‘반려동물에 대한 폭력’이 있는 경우 배우자분이 신체폭력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하며,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자녀가 듣는데도 배우자에게 언어폭력을 한다면 자녀가 없는 자리에서는 신체폭력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도 동물의 한 종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동물을 때리는 손이 사람을 때리는 손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질문자분 역시 신체폭력에 노출되어 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실제로 남편분 손버릇이 있다고도 표현하셨고요.

 

가정폭력 피해자 대부분은 그 상황을 참고 견디려 합니다. 가해자가 늘 폭력을 저지르는 이유를 피해자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피해자 역시 가해자와 폭력이 정당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의 가해자와 공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외부 도움을 요청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포함한 가정 폭력은 참고 함께 살수록 점점 더 심해지기 마련입니다. 피해자가 외부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것을 가해자가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질문자분께서는 현재 남편과 따로 살아야 하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일단 폭력에서 벗어나 질문자분이 안정을 찾아야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친정 상황을 잘 모르겠지만, 먼저 친정에 현 상황을 얘기해서 친정을 든든한 지원군으로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현재 질문자분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도와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이런 사람들은 보통 친정 식구들입니다. 

또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은 질문자분을 위해서도, 또 아이들을 위해서도 정신과 진료는 필요합니다. 가정 폭력을 겪은 아이들은 훗날 자신이 가정 폭력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확률이 보통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더 높습니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치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렇게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남편과 분리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친정집으로 아이를 데리고 피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일단 질문자분만 피할 수도 있습니다. 이후 남편의 태도변화를 살피며 다시 합가하는 조건으로 폭력의 중단과 정신과 치료를 권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합가하지 않는다면 변호사와 상담하며 이혼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부부가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많은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질문자분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결혼 생활은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조건으로 다른 노력들을 타협하는 것은 결국 폭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남편분이 폭력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이후에, 서로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과정입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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