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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함께 걷는 시간 - 트라우마 치료

기사승인 2020.06.15  0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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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신문 : 나종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모든 정신 질병이 발생할 위험성을 가장 많이 높이는 요인은, 어린 시절의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를 당한 경험이다.”

정신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 중 하나인 미국 정신의학회 학회지에 최근 발표된 논문에서 전문가들은 말한다(1)

정신 의학의 진단 매뉴얼인 DSM-5에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진단이 성립하기 위한 트라우마를 ‘실제적인, 혹은 위협을 당하는 것이든 간에, 죽음/심각한 부상/성폭력을 직접 경험하거나, 타인에게 일어나는 것을 직접 목격하는 것, 또는 이런 외상 사건이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에게 일어났음을 알게 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사실 이는 매우 좁은 의미의 정의이며, 이에 대한 비판 의견도 적지 않지만, 여기서 논의는 적절치 않을 것 같다.) 
 

어린 시절 학대당한 경험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 (사진_픽사베이)


미국 정신과 레지던트 4년 차는 보통 자신의 관심분야에 따른 맞춤 교육이 가능하다. 이 기간 동안, 나는 PTSD 치료에 대해 보다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

PTSD 환자들에게 검증된 약물 치료는 매우 드물고, 보통 항우울제를 쓰기는 하나, 트라우마에 중점을 둔 심리치료들(trauma focused psychotherapy)을 먼저 시도해보는 것을 추천한다(2). 그래서, PTSD의 가장 대표적인 심리 치료법 들을 배워보고 싶었고, 이 중에서 지속적 노출 치료(Prolonged Exposure)와 Cognitive Processing Therapy(인지 행동 치료를 바탕으로 한, PTSD 치료법)를 통해 PTSD를 겪는 환자들과 일할 수 있었다.

치료과정을 요약하자면, 트라우마 당시의 경험을 면담 중에 지속적으로 복기하고, 그 기억으로 인해 피하게 되는 현실 상황들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도록 순차적으로 돕거나, 트라우마로 인해 발생한 인지적 왜곡(세상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적 사고, 트라우마에 대해 자책하는 사고 등등)을 함께 수정해가는 과정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을 돕는 과정이었다.

많은 PTSD 환자들의 경우 트라우마 기억을 억압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실, 처음에 환자들을 만날 때는 두려움 또한 컸던 것이 사실이다.

‘이 환자가 충격적인 기억을 끄집어내다가, 오히려 악화되는 것은 아닐까.’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상습적인 정서적/언어적/신체적 학대를 당한 환자들을 비롯하여,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가서 수많은 전우들/적군의 죽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환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앞서 어떤 글에서, 나는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의 용기에 대해 언급했었다. 자기 자신의 트라우마를 피하지 않고, 매 회기마다 꼬박꼬박 많은 양의 숙제를 해오며 치료에 열중하는 환자들을 보며, 이와는 또 다른 차원의, 경외심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놀랍게도 환자들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이 넘게 지난 어릴 적 기억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 맡았던 냄새, 느꼈던 감정, 머릿속에 오가던 생각들을 그들은 거침없이 쏟아내었고, 그렇게 우리는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환자들에게서 생생하게 듣는 트라우마의 경험들은, 치료자로서 나에게도 간접적인 트라우마로 느껴질 만큼 아프게 다가왔다. 알코올 중독을 앓는 엄마에게 매일 밤 폭행당하던 한 소년은, 이제는 본인 또한 중독 문제와 PTSD를 함께 앓는 청년이 되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많은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던 동료를 살리지 못한 전역 군인은, 죄책감과 악몽에 시달리며, 잦은 자살 생각을 호소했다.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한 소녀는, 중년의 여성이 되어 만성적인 우울증과 성격 장애 진단을 받고 매주 진료소를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라우마 치료 과정은 내 레지던트 과정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경험들 중 하나였다. 처음 배우는 분야였던 만큼, 환자들을 위해 나도 최대한 공부하고, 준비해서 치료에 임했다. 환자들 또한 많은 부분에서 증상이 호전되었고, 유대감 또한 끈끈했다고 생각한다.

PTSD 환자들은 흔히, 트라우마의 경험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리곤 한다. 그 환자들과 ‘당신 탓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깨달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매우 보람 있는 과정이었다. 학대와 트라우마의 기억을 딛고 일어서는 환자들을 보며, 돌 틈 사이로 핀 꽃을 떠올렸다.

소아병동을 돌 때와 마찬가지로, 어릴 적 학대받은 환자들을 보며 다시 한번 부모의 자격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쉽지 않았던 트라우마 환자들과의 치료과정 중에서도 가장 가슴이 아렸던 순간이 있었다. 어렸을 때 지속적으로 아버지에게 정서적, 언어적으로 학대받았던 한 환자에게, 언젠가 그렇게 물었었다. 어렸을 때 가장 좋았던 기억이 무엇이냐고. 늘 어릴 때 이야기를 하면, 짜증을 내거나, 울거나, 화를 내던 환자는 처음으로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 좋았던 적이 한순간도 없었던 것 같아요. 아니 적어도 기억은 안 나요. 그런데 딱 한번 있어요, 아빠가 날 목말 태워줬을 때가. '와 정말 높다.' 너무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나요.”
 

사진_픽사베이

* 환자의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일부 내용이 각색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참고문헌:

(1) Lippard E & Nemeroff CM, The Devastating Clinical Consequences of Child Abuse and Neglect: Increased Disease Vulnerability and Poor Treatment Response in Mood Disorders,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177: 1, 2020

(2) Stein MB, Approaching to treating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in adults. In: UpToDate, Post TW (Ed), UpToDate, Waltham, 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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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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