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슬로우의 이론을 중심으로

[김제환]
- 정신건강임상심리사 1급
- 네이버 지식iN eXpert 마음상담 전문가

홍길동전은 17세기에 창작된 최초의 국문소설이자 10여종 이상의 판본과 30여 종의 이본이 존재할 정도로 널리 읽힌 고소설이다. 하지만 이렇게 널리 읽힌 데 반해 소설의 창작자에 대한 의문이나 율도국의 등장에 관한 당위성 문제, 소설 주제에 대한 엇갈린 의견들 때문에 아직까지 논란거리가 많은 소설이기도 하다.
 

신동우 화백의 『풍운아 홍길동』 삽화


이렇듯 논란이 많은 데에는 과도하게 사회의식적인 주제 파악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중옹호와 사회혁명이 홍길동전의 주제라고 하는 김태준의 이론은 반세기 가까이 지지를 받았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단계적 신분상승에 초점을 맞춰 홍길동전을 일종의 출세소설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또는 개인적 욕망 충족의 과정으로서 이해하려는 노력도 있어 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홍길동전을 실제 이상으로 사회 의식화하여 이해하려는 연구상의 편향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비판과 반성에서 사회의식의 한계성이 엄밀히 검토되기도 하였다. 

작품의 표면에 드러난 사상이나 내용을 간추려 묶음으로써 주제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초기의 소박한 견해에 비해 후대로 내려올수록 주인공의 행동 양상을 분석하고 작품의 구조와 병행하여 합리적으로 주제를 파악해 보려는 노력을 통해 보다 설득력있는 견해가 제기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과 그 적용과정은 아직까지 충분하다고 할 수가 없다. 특히 홍길동전은 그 구성면에서나 전개되는 사건에 있어서 단순하게 처리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재하고 있는 것으로 흔히 지적되고 있다. 

홍길동전이 사건 중심의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표면적인 사건을 독립적으로 다루든지 어느 하나를 선택적으로 분석하면 의미 구조상 종적으로 많은 논리적 괴리와 불통일성을 보여주며 횡적으로도 여러 주제가 통일이 안된다. 

이러한 작품적 특성을 고려할 때 사건과 행동의 원동력이 되는 인물을 일차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간단히 말해서 홍길동전은 홍길동이라고 하는 문제적 개인의 일대기 형식이다. 그런 중에서도 그의 10세 전후의 청소년기로부터 40세 전후의 중년기에 이르는 성장과 성숙과정이 특히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을 통해 그가 벌이는 사건과 행동은 근본적으로 그에게 종속되는 것이기에 무엇보다 주체로서의 인물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표면적인 사건이나, 아니면 구성상에 드러나는 통일성의 부족(또는 결여)까지도 근원적으로는 홍길동이라는 인물 자체에 내재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홍길동전 자체가 홍길동의 개인적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길동 개인의 내면적 갈등이 극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동기가 되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이러한 수정된 관점에 의거하여 심리학적인 접근법으로 각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밝혀 보기로 한다. 
  

1) 인물유형과 관계

한 사람의 인격형성에는 유전적인 요인도 작용하지만 환경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한다. 그 중에서도 주변사람들을 통해 얻은 경험은 평생을 걸쳐 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에릭슨(Erikson)의 ‘심리사회적 발달의 8단계’에서 그는 ‘출생에서 약 1세까지의 시기에 아기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영아의 신체적, 심리적 욕구를 잘 충족시켜 주면 아기는 신뢰감을 형성하게 되고, 만약 아기의 욕구가 잘 충족되지 않으면 아기는 불신감을 갖게 된다’고 하였다. 

즉 어린 시절에 경험하는 최초의 인간관계가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세계관은 평생에 걸쳐 수정되고 발전된다. 때문에 홍길동의 주변인물들이 홍길동의 세계관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들과 길동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소설 속의 큰 분기점 마다 홍길동이 행동의 방향을 결정짓는데 주변 인물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인물의 유형과 그 인물들과 홍길동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홍길동전에는 홍길동, 임금, 홍판서, 홍인형, 홍판서의 정실과 천첩, 백성, 도적, 비복 등의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모든 인물이 개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작중 역할이 뚜렷한 인물만을 가려 뽑되 공통점에 따라 몇 갈래의 유형으로 정리하는 것이 편리하리라 본다. 

주인공인 홍길동, 그리고 홍길동에게 끊임없이 윤리적 덕목을 강조하는 임금, 홍판서, 홍인형, 그리고 홍길동을 음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곡산모 초란, 상녀, 특재, 그리고 홍길동과 가까운 거리에서 깊은 유대 관계를 맺는 백성, 도적으로 묶을 수 있는 바, 모두 네 가지의 인물유형이 된다.

임금, 홍판서, 홍인형은 지존무상의 자리에 있거나 부귀권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들이다. 신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필요도 없을 정도로 대단하지만 능력은 그렇지 못하다. 임금은 홍길동을 도적, 반적이라고 규정한 뒤 “뉘 능히 길동을 잡아쥭일고”하다가, 종래에는 병조판서의 직첩을 내리고, “션릉은 홍진 사람이 아이라”며 얼굴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당하고 만다. 

도적, 반적으로 지목한 자에게 도리어 높은 벼슬을 내려야 하는 장면을 통해 지존의 임금이 사실은 능력 없는 자임이 드러난다. 홍판서는 체신을 존중하는 자이기에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겠지만, 드러낼래야 드러낼 만한 능력도 없다. 홍길동이 관가, 부호가를 약탈해도 막지 못하고 어전에서 홍길동이 임금을 우롱해도 제지하지 못한다. 

홍인형 또한 홍판서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길동을 잡는 중책을 맡지만 이를 감당할 능력을 지니지 못한 채 인간의 도리만을 강조할 따름이다. 임금, 홍판서, 홍인형은 능력이 신분을 따르지 못하는 자들임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이 점에서 초란, 상녀, 특재와는 대조적이다.

초란은 기생출신의 천첩으로서 홍판서의 총애를 받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인물이다. 정실이 아니니 방정한 부덕을 표방할 필요가 없고 기생일 때에 익힌 아양과 교태를 최대로 발휘하면 그만이다. 

홍길동의 명성이 날이 갈수록 드높아지고 “너도 길동갓탄 아달이나 나하 나의 마암을 위로하라”는 홍판서의 요청마저 이행할 수 없게 되자 초란의 이기심이 발동한다. 무녀와 함께 홍길동을 죽일 계책을 도모하다 홍판서의 반대에 부딪히자 정실과 홍인형을 설득하여 기어이 가내에 분란을 일으키고 만다. 

홍판서가 반대하는 일을 강행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가를 모를 리 없건만 기득권을 지키려는 일념은 이런 염려를 잊어버리게 한다. 결국 홍판서에게 도덕을 거스르는 자로 낙인찍혀 하루아침에 쫓겨남으로써 그동안 누린 호강도 끝을 맺게된다. 터무니없는 짓을 행하면 응징을 당한다는 도덕율이 부각되지만, 본능적 욕구에 충실한 인간의 몸부림도 동시에 부각된다. 

따라서 도덕율을 일방적으로 적용하여 악인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어떠하든지 간에 홍판서를 사로잡을 재주가 있고 가중의 분위기를 한때나마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능력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상녀는 이름 그대로 관상을 보는 자이다. 무녀가 초란에게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로 소개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런 면을 보여준다. 홍길동의 상을 보고 “만고영웅이라 흉중의 조화랄 품엿고 미간의 산쳔정긔 녀용하나이” “만일 쟝셩하오면 쟝찻 멸문지화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홍길동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의도에서 공공히 발설하기는 했지만, 장래를 정확히 짚었다고 할 수 있다. 홍길동이 비록 천생이나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되는 것은 인력으로 막을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는데, 신분보다는 능력이 우선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했다.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살아남기 어렵다. 홍판서에게서야 소문을 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후한 상금을 받지만, 천기를 누설했기 때문에 홍길동에게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다. 

홍길동은 “네 일개 요물노 대신을 혹하여 인명을 살해코져 하이 엇지 하늘리 무심하리오 날노 하여 너랄 쥭여 후폐랄 업게 하시이 날을 한치 말나”하고 꾸짖었다. 상녀가 요물이므로 하늘이 후폐를 없게 하라고 명한다고 하지만, 천기를 누설하기에 요물이지 악인이어서가 아니다. 돈을 받고 능력을 파는 상녀는 선한 일도 할 수 있고 악한 일도 할 수 있는 바, 보다 능력이 더 강한 홍길동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지적이 타당할 것이다. 

특재는 전문적인 자객이다. 초란에게 천 금을 받고 홍길동을 해하려는 것으로 보아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는 인물이다. 그러자면 대단한 능력을 지녔을 법한데, 세간에 “용역이 과인하여 날져비랄 잡는”사람으로 이름이 나 있다. 

문득 까마귀 세 번 우는 것을 보고 대사 그르칠 우려가 있음을 예견하면서도 홍길동쯤은 문제없다고 할 만큼 뱃장도 두둑하다. 특재는 결국 홍길동에게 죽고 말지만, 이 역시 죽은 원인이 악한 행동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홍길동을 해하려 했기에 죽었다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너를 쥭여 후환을 업시 하리라”는 말을 염두에 둘 때, 특재와 같이 능력 있는 자는 뒷날 도모할 자신의 일에 장애가 되리라는 생각을 했을 법하다. 홍길동은 특재와 상대할 때 실로 많은 재주를 발휘했다. 홍길동이 그만큼 뛰어나다기보다는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특재의 능력이 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초란, 상녀, 특재는 천미한 자들로서 득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는 적극성을 지녔는데, 신분이 낮다고 해서 모든 인물이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신분이 낮은데도 이런 적극성을 지니지 못한 인물이 있는 바, 백성, 도적이 바로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백성은 막연한 백성이 아니고, 도적은 막연한 도적이 아니다. 백성, 도적은 같은 바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도적은 “비록 젹당이나 본래 향민”이었다는 말을 상기할 때, 향민 즉 일반 백성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도적으로 변했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무슨 이유로 백성이 도적이 되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활빈당 사업이 관가, 부호가의 곡식을 털어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므로 사회에는 상당히 유족한 자와 극도로 궁핍한 자가 공존한다고 할 수 있다. 필시 관리나 부요층이 재물을 모으기 위해 하층 백성을 착취했을 터이고, 가렴주구와 수탈에 시달리다 못한 얼마의 백성이 도적으로 탈바꿈했을 것이다. 일반 백성 가운데서 보다 과감한 자가 바로 도적인 셈이다.

도적은 심산궁곡에 거점을 두고 있다. “층암절벽은 벽공의 쇼쇼앗고 긔화요쵸는 사면의 둘너”있는 험산 지하에 수백 호의 군락을 이루고 산다. 그 숫자만 해도 적지 않을 것이니 도적질을 하더라도 대규모로 할 법한데, 그런데도 전체를 통솔할 우두머리가 없는 상태이다. 

이럴 즈음에 홍길동이 당도하자 도적들은 시험문제를 제시하고, 이를 해결해 내자 단번에 우두머리로 추대한다. 홍길동에게 제시한 시험이란 무게 천근인 소부석을 드는 것과 해인사를 약탈하는 것, 두 가지이다. 두 가지 중 첫 번째를 해결하는 것을 본 도적들은 두 번째를 확인하지 않은 채 곧 바로 홍길동을 우두머리로 추대했으니 괴력을 지니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단순하다. 

해인사 약탈사건으로 관군에게 쫓김을 당하자 도적들은 “아모리 할 쥴 모라고 도료혀 길동만 원망”하는데, 이로써 얼마나 단순한지를 가늠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도적들은 홍길동의 휘하에 들어간지 “슈월 지나의 군볍이 졍제”되고 의적노릇을 하며 율도국에 들어가 군병이 되기도 한다. 단순한 바가 있기는 하지만, 집단화되었을 때 상당한 역할을 수행할 잠재력이 있다는 점에서는 그 비중이 결코 가볍지 않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네 인물유형 간에는 신분도 일정하지 않고 능력도 일정하지 않다. 신분은 타고나는 것이므로 가계나 혈통에 따라 일정하지 않음이 당연하겠으나, 능력은 신분에 귀속되므로 신분에 따라 일정하게 나타나야 제격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그렇지 않아서 의외이다. 능력을 내세우며 살아가는 홍길동, 초란, 상녀, 특재 같은 인물은 신분상으로 보잘 것 없는데 비해, 신분을 내세우며 살아가는 임금, 홍판서, 홍인형 같은 인물은 능력이 보잘 것 없는 바, 능력이 신분과 달리 나타나기에 이런 현상이 생긴다. 신분이 낮은 자가 강한 능력을 지니고 신분이 높은 자가 약한 능력을 지닌다는 설정은 어느 모로 보나 사회적 통념을 뒤집었다고 할 수 있다. 신분과 능력의 관계가 이와 같으니 인물들의 행동도 아주 다양하게 전개되리라 예상되나 작품의 실상은 이런 예상을 벗어난다. 

임금, 홍판서, 홍인형의 인물군과 초란, 상녀, 특재의 인물군은 성격이 엄연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모두 홍길동을 적대자로 지목하고 있으며, 홍길동은 백성, 도적을 끌어들여 이에 맞서고자 한다.

이익추구를 위해서 행동하는 초란, 상녀, 특재와 체제유지를 위해 행동하는 임금, 홍판서, 홍인형의 잇속이 홍길동이라는 대상에서 일치되었다. 그리고 홍길동은 필요에 따라 백성, 도적과 제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백성, 도적은 곡산모, 상녀, 특재와 달리 소극적이다. 필연적으로 홍길동은 적대자와 맞서 힘겨운 투쟁을 거듭해야 되며,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서는 승리할 수 없게 되었다.
  

2) 홍길동이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

앞 장에서 인간의 성격은 유전적인 요인과 환경적인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 모형 가운데 Conrad Waddington(1966)의 ‘수로화 모형’에서는 어떤 특성이 유전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수로화의 사전적 의미는 운하를 파고 배출구를 만들어 흐름의 방향을 유도한다는 의미로서, 강하게 수로화된 특성일수록 유전적으로 설계된 계획을 따르기 때문에 환경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지만, 약하게 수로화된 특성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고 한다. 

사실 홍길동은 홍판서의 꿈이 말해주듯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된 영웅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서얼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이지 못한다. 홍길동 스스로도 자신의 능력을 인지하고 있었던 만큼 유전적으로 타고난 능력과 환경의 충돌은 그를 매우 힘들게 한다. 

홍판서는 그의 능력을 아까워하면서도 그로 인해 가문이 위기에 빠지게 될까봐 홍길동을 산정에 감금하고, 곡산모 초란은 홍길동을 시기해 살해하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홍길동은 그런 환경에 굴하지 않고 소설의 예정된 목표를 향해 걸음을 내딛고 끝내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좀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바로 율도국의 등장이다. 홍길동전은 홍길동의 주요 활동무대가 어디냐에 따라 가정, 국내(조선사회), 국외(율도국)로 나뉜다. 가정과 국내에서는 사회적인 제약으로 인해 홍길동 자신의 능력을 백분 발휘하지 못하다가 율도국으로 진출하면서 신분이라는 현실적인 제약이 사라지게 되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되고, 결국 최종목적인 왕이 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율도국에서의 내용은 앞서 가정, 국내에서의 내용과는 너무 이질적으로 전개된다는 문제가 있다. 이 소설에서 율도국은 홍길동 개인의 문제가 해결되는 이상향으로서 설정이 되는데, 앞서의 내용이 신분제도의 폐해라는 당대 조선사회에서의 문제를 현실적인 시각으로 다루었던 것에 비해 너무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이다. 

즉 아무런 단서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이러한 무대가 등장함으로써 소설의 통일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율도국의 등장은 홍길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무대이다. 때문에 이 장에서는 장면에 따른 홍길동의 성격형성 과정을 매슬로우의 ‘욕구위계이론’에 바탕을 두고 전개하면서 소설 속 인과관계와 율도국 등장의 당위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행동을 활성화 시키고 이끄는 다섯 가지 타고난 욕구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인간의 선천적 욕구는 생리적 욕구(psychological needs)-안전욕구(safety needs)-소속감과 사랑욕구(belonging and love needs)-존중욕구(esteem needs)-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 로서, 하위 욕구인 생리적 욕구부터 순차적으로 생겨나게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모든 욕구가 동시에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한 시기에는 하나의 욕구만이 우세하게 된다. 그것이 어떠한 욕구인가는 다른 욕구가 충족되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생리적 욕구는 모든 욕구 중에서 가장 강력한 욕구로서 음식, 물, 공기, 수면, 성 등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다면 다른 욕구들이 완전하게 차단될 수 있다. 홍길동은 서자이지만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나 이 욕구는 태어날 때부터 충족되어있었기에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안전욕구는 질서 있고, 안정적이며, 예언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유기체의 요구이다. 안전 욕구의 만족을 위해서는 안전, 안정성, 보호, 질서, 그리고 공포와 불안으로부터의 자유가 요구된다. 

소속감과 사랑 욕구는 개인이 다른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 특별한 친구 관계, 연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며 특별한 집단에 소속되기를 바라는데서 생기는 욕구이다. 이러한 욕구는 다른 사람과 긴밀하고 따뜻한 관계 속에서 충족될 수 있다.

존중 욕구는 자신에 대한 존중과 타인으로 부터의 존경으로 채워질 수 있다. 자아존중을 이루기 위해 개인은 유능감, 자신감, 숙달, 성취, 독립, 자유 등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자아존중의 욕구를 충족시킨 사람은 자신의 힘, 가치, 적절함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참된 자아존중은 자신의 능력과 경쟁력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 위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매슬로우는 지적하였다.

자아실현 욕구는 자신의 모든 잠재력과 능력을 인식하고 충족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성취하는 욕구로서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의 잠재적인 능력을 실현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말한다.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사회와 자기 자신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하며, 둘째는 욕구위계에서 하위에 있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에만 집착해서는 안되며, 셋째는 가족 및 타인들과 친밀감을 느끼며, 남과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자신의 강점과 약점, 선악에 대한 현실적 지식을 갖어야 한다. 


(1) 가정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났지만 일단 양반가의 자제이다. 그래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문제에 있어서(생리적 욕구)는 문제시 될 것이 없다. 때문에 이 시기에 홍길동에게 제일 중요한 과제는 바로 신변의 안전을 유지하는 것(안전 욕구)과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인정을 받는 것(소속감과 사랑욕구)이다. 그 중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는 사회는 물론 집안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서자라는 위치에서 오는 열등감 때문에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본질적 도전은 타인과 효과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개인이 맺는 이러한 관계의 불안전감에서 비롯되는 ‘기본적 불안’(basic anxiety)을 호나이(Horney)는 ‘적대적 세계에서 자신도 모르게 증가하는 모든 측면에 파고드는 고독과 무력감’이라고 정의 내렸다. 

사실 홍길동이 초인적인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그 능력을 마음껏 드러내 보이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때문에 혼자서는 아무리 잘났더라도 주류에 편입하지 못하면 살아남기가 어렵다. 홍길동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 포부를 위해서는 기존 사회체제로 부터의 인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길동의 불완전한 위치는 자꾸 그를 좌절하게 만든다.

“길동이 재배고 왈 쇼인이 평생 셜운 바는 대감 졍기로 당당하은 남자되여사오매 부생몽휵지은이 깁삽거늘 그 부친을 부친이라 못하옵고 그 형을 형이라 못하오니 엇지 사람이라 하오리잇가 하고 눈물 흘여 단삼을 젹시거늘 공이 쳥파의 비록 측은 하나 만일 그 뜻을 위로하면 마음이 방자할가 져어 크게 꾸지져 왈…… 차후 다시 이런 말이 이시면 안젼의 용납지 못하리라 하니 길동이 감이 일언을 고치 못하고 다만 복지 유체뿐이라”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길동은 호부호형을 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의 기본적인 자격마저 박탈당한 자기 입장에 대해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복종(submissiveness)’의 길을 선택한 길동은 부생모육지은(父生母育之恩)이 깊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고 있으며, 자신의 요구가 타당한 것이었음에도 부친의 꾸짖음에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부친의 꾸짖음을 전적으로 수긍한 것도 아니었다. 길동의 울음은 부친의 꾸짖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와 함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의 의식이 고통스럽게 분열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의식이 분열되는 것은 길동이 두 가지 상반되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충과 효의 윤리관이 중심을 이루는 세계와 그러한 세계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서자도 적자와 동등한 사회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그를 고뇌하게 만들고 이러한 평범하지 않은 걱정은 그를 고독한 예외자로 만든다. 삶의 동반자를 가질 수 없는 데에서 길동은 필연적으로 그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 환경과의 사이에 갈등을 유발시키게 되고, 스스로의 투쟁에 의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획득할 수밖에 없었다.

"길동이 매양 호부호형하면 문득 꾸지져 못하게 하니 길동이 십세 넘도록 감히 부형을 부르지 못하고 비복 등이 쳔대하믈 각골통한하여 심사를 졍치 못하더니…… 셔당의셔 글을 닑다가 문득 셔안을 밀치고 탄 왈……나는 엇지하여 일신이 젹막하고 부형이 이시되 호부호형을 못하니 심쟝이 터질지라 엇지 통한치 아니리오"
  
십세 넘도록 호부호형을 하지 않고 주어진 처지에 순응하는 길동에게 돌아오는 것은 실의와 좌절뿐이었다. 위의 인용문은 순응에 의한 좌절의 경험이 길동에게 반항으로 연결될 수 있는 자아각성의 계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길동의 반항이 외부의 압력에 의한 어쩔 수 없는 변모였다는 것을 보여주며, 길동의 반항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동시에 길동에게 가해지는 외부의 압력이 부당한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길동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압력에 순응하려 했음에도, 세상은 길동에게 가하는 압력을 철회하지 않고 그를 죽이려 하기까지 함으로써(안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게 됨), 길동의 순응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길동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키워야했고 반항아적인 모습의 페르소나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 편에서 길동의 행위는 순응→반항의 순차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가정편에서 길동이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객을 죽이고 가출을 결행할 때까지 길동이 자의지와는 관계없이 계속해서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사건전개의 주체자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친에게 호부호형의 허락을 요구하고, 가출을 결심하고, 육도삼략과 천문지리를 공부한 뒤 마침내 자객을 죽이고 가출을 결행하는 길동의 반항행위는 질서정연한 단계를 거치며 확산되고 있다. 압력→순응→반항이 하나의 사건단위가 되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반항아로 변모할 수밖에 없는 길동의 정당성을 거듭해서 옹호해주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길동이 행동적 반항아로 성장하는 모습을 설득력있게 보여줄 수 있다.

가정편에서 길동이 반항아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는 길동 자신의 자아개념에 대한 의문이다. 이 시기 홍길동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 스트랭(strang)은 ‘네 가지 자아개념 유형’을 설정했는데, 

첫째, 종합적이고 기본적인 자아개념(overall, basic self-concept)으로 이것은 자신의 인성에 대한 청소년의 관점과 자신의 능력, 상태, 외부 역할에 대한 “지각”이다. 길동의 경우 서자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기본적인 자아개념은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두 번째, 개인의 일시적이거나 순간적인 자아개념(temporary or transitory self-concept)이다. 이러한 자아개념에는 순간적인 기분이나 최근의 경험, 혹은 지속되는 경험이 영향을 준다. 길동의 경우 자신의 능력에 대해 지각하고 있으며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도, 홍판서의 꾸지람 한 번에 좌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셋째로, 청소년의 사회적 자기(social sleves)가 있다. 즉, 본인의 생각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춰진 자신이라 생각되는 자기이다. 이것은 다시 청소년의 자신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정체감은 부분적으로 친밀감, 집안에의 참여 활동, 자신의 연속성 또는 타인을 대상으로 한 동일시를 통해 형성된다. 홍길동의 경우는 집안에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집안 대소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동일시의 대상인 아버지마저 자신을 외면함으로써 극도의 정체감 혼란을 겪게 된다. 

“길동이 공경되 왈 쇼인이 맛춤 월색을 사랑하미여니와 대개 하늘이 만물을 내시매 오직 사이 귀오나 쇼인의게 니르러는 귀하오미 업사오니 엇지 사람이라 하오리잇가”

위의 인용문은 길동이 부친에게 하는 말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물음이다. 사람은 모두 귀한 존재인데 유독 자기 자신만이 귀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이 불만스럽다는 말이다. 길동은 답답한 현실적 여건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차원은 이상적 자기(ideal self)인데, 이것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자기이다. 너무 낮은 이상적 자기는 성취를 방해할 수 있고, 너무 높은 이상적 자기는 좌절과 자기 가치감의 저하를 가져올 수 있다. 길동의 경우 자신이 처한 현실에 비해 입신양명이라는 너무 높은 이상을 지니고 있었기에 자아 개념과 자기 이상간의 차이로 인해 자신에 대한 존중감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존중감을 “영혼의 생존에 필요한 요소”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존중감이야 말로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정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증명할 수 없었던 길동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정체감을 완성하여 불안을 없애고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정을 나와 사회와 대립하게 된다. 
  
(2) 조선 사회
  
가정에서 ‘안전 욕구’와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가출을 하게 된 홍길동은 적당에 가입해서 이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게 된다. 때문에 이 시기에 그에게 중요한 것은 ‘존중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의 충족’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가 완벽하게 충족된 것은 아니다. 

매슬로우도 어떤 욕구는 위계의 다음 욕구가 중요하게 되기 이전에 충분히 만족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즉, 모든 욕구가 완벽하게 충족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길동이 새로운 공간을 찾아나서는 동시에 옛 공간으로 되돌아 가고 싶어하는 모습에서 확인된다. 

가출을 하면서 생모인 춘섬에게 “다시 뫼실 날이 있사오리니 모친은 그 이 귀체 보중쇼셔”라고 하며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있고, 활빈당 행수가 되어 팔도를 횡행하다가도 “ㅣ져 디감계셔 당초의 쳔한 길동을 위하여 부친을 부친이라 하고 형을 형이라 하여던들 엇지 이외 니르리잇고”하며 가출을 한 것이 전혀 자기의 본심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조선을 떠나서도 길동은 부친의 시신을 제도에 안장하고, 모부인 및 생모를 율도국으로 모셔오고 있으며, 조선 임금께 표문을 올려 조선과의 유대를 다지기도 한다.


사회에 나와서 길동은 해결하지 못한 기본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힘 성취(attaining power)’에 몰두하게 된다. ‘활빈당’을 조직해 그 두목이 된 길동은 그 힘을 이용해 탐관오리를 징벌하고 빼앗은 재물들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준다. 여기서 길동은 ‘구세주 콤플렉스’를 보인다. 

즉 자신의 처지를 일반 백성들의 문제와 연관시켜 그들의 고충을 대신해결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시기의 길동의 나이는 요즘 나이로 치면 사춘기 청소년에 해당한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이 시기 청소년이 보이는 이상주의에 기인한다. 도덕적 추론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하는 청소년기에는 현실과 가능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어른들의 세상이 어떠한가 뿐만 아니라 특히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어떠할 수 있다는 것까지 변별할 수 있다. 

이렇게 현재 상태와 가능성을 구분해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됨으로써 이상주의적(idealistics)이 되는 것이다. 실제와 가능성을 비교하고, 실제가 이상보다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며,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사회와 어른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어떤 청소년들은 정치적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이상사회 건설이라는 신념에 몰두하기도 한다. 

또 청소년들은 정치적 이상주의자가 되는 동시에 약한 자들을 위한 투사가 된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은 바로 이들 자신의 내적 혼란 때문에 가능하다. 자기자신의 심리적 위치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약하고 가난하며 이기적인 사회의 억압된 희생양인 사람들을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지각하는 사회적 불평등은 실은 자신의 내적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다. 

길동의 경우 비복마저 천대하는 자신의 불안한 처지와 계속되는 좌절의 경험으로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을 품게되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적인 불만을 민중들의 저항의지와 연결시킨 다음 사회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주석 20번의 인용문을 다시 끌어와 보면, 
  
“길동이 공경되 왈 쇼인이 맛춤 월색을 사랑하미여니와 대개 하늘이 만물을 내시매 오직 사이 귀오나 쇼인의게 니르러는 귀하오미 업사오니 엇지 사람이라 하오리잇가”
  
라고 하여 사람은 모두 귀한 존재라는 것, 즉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인식하고 있고, 그래서 개인적인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 개인적인 울분을 민중들의 집단적인 저항의지로 확산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을 계기로 길동은 자신이 조직한 활빈당과 함께 불의한 재물을 탈취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등 인간의 불평등을 기조로 하고 있는 데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사회적 비리를 공격하며,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투쟁의 과정에서 사용된 힘이 폭력이라는 것이다. 길동이 속한 조선사회는 결코 폭력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가치관을 가진 사회이다. 길동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사실 양반인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인물이다. 홍판서는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이고 그의 가치관은 사회 일반의 가치관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이러한 홍판서의 가치관을 홍길동은 자연스럽게 동일시하게 된다. 하지만 서자라는 신분에서 오는 좌절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주류 사회에 반항하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길동의 의지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때문에 길동은 자신의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행위의 원인을 백성의 제물을 빼앗아 호위호식하는 양반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그 양반의 재물을 다시 백성에게 돌려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쓴다는 태도를 형성한다. 

이러한 태도는 방어기제를 제공하며 내부갈등과 불쾌한 사실로부터 자아를 지켜주는 기능을 한다. 즉 양반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유지하고 자신은 사회적 약자인 백성의 편에 섬으로써 사회의 가치관에 반하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rationalization)시킨 것이다.


이러한 합리화는 그가 가정을 나와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도적의 두목이 된 동기는 “오날날 하날니 지시하사 위연이 이고되 이르러시니 녹님호걸의 읏듬장슈 되미 엇더한요” 하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는데 내용을 본즉, 도둑을 ‘녹님호걸’로 부르고 그 두목이 되는 것을 ‘하늘의 지시’로 받아들이고 있다. 

도적의 두목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도적의 두목은 자신의 가치관과는 상반된다. 때문에 그 무리의 이름을 활빈당으로 고치고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조선팔도에서 노략질을 일삼은 것이다. 


이렇듯 길동에게 합리화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의 목표와 관련이 있다. 여러 번 밝혔듯이 길동의 꿈은 입신양명이다. 이는 왕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길동 자신의 행동이 사회와 고립되어 있다면 그는 평생을 가도 그 꿈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을 대내외 적으로 과시해 결국 왕의 눈에 띄게 된다. 하지만 왕의 눈에 길동이 곱게 비칠리 없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길동을 막을 길이 없었던 왕은 길동이 병조판서 제수를 요구하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길동을 잡기위한 함정이였고, 결국 길동은 조선에서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닳고 국외로 눈을 돌리게 된다.
  
(3) 국외
  
국내에서 홍길동은 사회적인 제약, 그리고 가치관의 혼란으로 자아를 실현시키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병조판서에 제수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궁극적인 갈등 해결의 단서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적 제약을 받고 있는 길동이 조선국과 계속 대립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갈등의 해결이 아니면서도 갈등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이 조선에서의 길동의 한계이다. 

이러한 한계를 안은 채 소설을 완결지운다면 작품의 완결성은 파탄을 면치 못할 것이며 전기소설이라는 문학적 관습에서 볼 때도 길동의 일생은 불완전한 상태로 끝을 맺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길동의 연장된 갈등을 해결하는 공간으로서 율도국이 설정된다. 


활빈당을 이끌고 조선을 떠난 홍길동은 해외로 나와 성도에서 3년간 군사력을 기르고, 망당산의 요괴를 친다. 이 때 요괴에게서 구해낸 백룡의 딸과 정·통 두 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는다. 그리고 무력을 써서 율도국을 정벌하여 왕이 되게 되자 백룡의 딸은 중전왕비, 정·통녀는 정·숙비로 봉한다. 그리고 조선의 왕에게 공문을 보내어 신하국으로서 조선과의 관계를 다진다. 

여기서 홍길동은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조선사회의 제도를 비판하면서도 자신 스스로 그 제도에 끌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첩을 두는 일부다처제, 그 자신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조선과의 관계회복 등의 행동은 조선사회에 맞서 자신이 행한 모든 반사회적 행위들을 부정하는 것인데 이는 결국 그 자신의 가치관이 조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때문에 여태까지 길동이 해온 행위는 결국 조선사회에 인정받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과정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즉, 부모에게 반항함으로써 관심을 받길 원하는 아이처럼 자신의 능력을 대외적으로 과신함으로써 그 존재를 조선사회 내에서 부각시킨 것이다. 결국 신분제도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도,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도 모두 크게 보면 권력자의 눈에 띄어 기존 사회제도에 편입하려는 명분이었을 뿐 사회자체를 바꿀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자신이 노력을 하면할수록 사회로부터 배척되어 멀어질 뿐이다. 

이는 길동이 사회에 편입하려는 노력의 도구가 바로 폭력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 조선사회는 폭력을 용인하지 않으며 길동이 폭력을 휘두르는 대상이 바로 자신이 인정받고자 하는 조선사회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길동이 노력을 하면할수록 사회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율도국에서는 폭력을 사용하면 할수록 자신의 신분이 높아진다. 

이는 국외에서의 대립은 자신이 속하고자하는 조선사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동의 폭력은 갈수록 대범해져 결국 명분 없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즉 뚜렷하지 않은 명분으로 율도국을 침략하여 국가를 전복시키고 왕이 된 것이다.


율도국은 “즁국을 셤기지 아니하고 슈십대를 젼자젼손하야 덕화유하 하니 나라이 태평하고 백성이 넉넉하야”로 미루어 자주적 전통을 보수해 온 평화로운 부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길동은 자신이 율도국을 정벌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들어 나라를 전복시키고 자신이 왕이 됨으로써 신분상승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렇듯 신분의 상승을 이루어낸 길동은 어떻게 보면 자아를 실현한 듯 보인다. 하지만 길동의 자아실현은 어딘지 모르게 억지스럽다. 길동은 조선사회에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일시적으로 병조판서라는 지위까지 신분이 상승하여 ‘존중욕구’를 충족시키지만 이는 길동을 잡기 위한 조선 왕의 궁여지책이었을 뿐 그 지위에 걸 맞는 어떤 역할을 부여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존중욕구’자체도 사실 따지고 보면 홍길동 자신의 자의적 해석에 의한 충족일 뿐이다. 


두 번째로 길동의 조선사회에 대한 반항은 개인의 신분상승욕구에 기인한다. 매슬로우는 ‘자아실현자는 자신 외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에너지를 쏟으며,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타인을 마치 자신의 형제처럼 대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길동은 시종일관 자신의 신분상승에만 몰두한다. 소설을 읽어보아도 그는 주변사람들을 이용할 뿐 자신의 편에 서있는 누구와도 대화 다운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의 대화 대상은 그의 생모를 제외하면 항상 그와 대립하는 인물들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활빈당은 그의 꿈을 이루는 하나의 도구일 뿐인 것이다.
세 번째로 ‘자아실현자는 지극히 관대하여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인종적이거나 종교적 혹은 사회적 편견을 갖지 않는다(민주적 성격구조)’ 그러나 해인사의 재물탈취와 관련하여 불교에 관한 길동의 견해를 보면,
  
불도라 하읍난 거시 셰상을 소기고 백셩을 혹게하여 갈지 아니하고 배셩의 곡식을 취하며 갚지 아니하고 백셩의 의복을 소겨 부모의 발부를 상하야 오랑키 모양을 숭상하며 군부을 바리고 부셰를 도망하오니 이예 더한 불외지사 업사오며

라고 하여 조선 선비들의 일반적 견해인 숭유척불 사상을 보인다. 하지만 천비소생으로 가중의 천대와 사회적 차별을 당해온 홍길동이 하필 불교에 대하여 그러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기까지의 경위나 당위성은 하나도 드러나 있지 않다. 


네 번째로 자아실현자는 ‘일정한 틀에 맞춰 생각하라고 강요하는 사회, 문화적인 압박에 자유스럽게 저항한다.(문화화에 대한 저항)’ 하지만 길동의 경우 작품 전편을 통하여 유교적 의식에서 자유스럽지 못한 인물임이 드러나고 있다. 즉, 봉건적 인륜관계를 존중하고, 군신관계를 저버리지 않으며, 율도국을 정벌하여 왕이 된 이후에는 조선국왕에게 표문을 올려 충성을 약속하고 신속(臣屬)한다. 그리고 중국을 섬기지 않는 율도국을 정벌하고 중국에 사대하는 조선에 신속함으로써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를 표방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자아실현이 억지스러운 이유는 율도국의 존재와 관련된다. 홍길동은 조선사회에 반항하는 인물이지만 그 능력이 비상하여 왕까지도 그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능력은 결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은 사회와의 대립을 통해서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사회에 위협이 될 뿐이다. 그래서 그는 그 능력에 걸맞는 어떠한 지위도 온전히 성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사회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율도국을 선택하게 된다. 

율도국에서 길동은 아무런 제약없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과시하지만 이는 조선사회 내에서 입신양명하여 가문에서 인정받고자 했던 그의 원래 목적과는 다른 방향의 성취이다. 그래서 길동은 율도국의 왕이 되었지만 끝내 조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과 군신관계를 맺어 그 사회에 소속되길 원한다. 


홍길동전은 홍길동의 입사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영웅소설이다. 그는 조선사회의 대표적인 반항아로서 그리고 어려운 민중의 구세주로서 알려져 왔다. 하지만 홍길동이라는 인물은 결코 민중의 영웅은 될 수 없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의 조선사회와의 대립은 그의 개인적 욕구만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그의 가치관이 자신이 대립하고 있던 사회일반의 가치관과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길동은 시종일관 사회에 반항하면서도 그 사회의 가치관을 받아들여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을 성장시켜왔다.


초기에는 홍길동도 반항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지속적인 좌절과 안전에 대한 위협은 길동을 반항아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반항은 적대적인 세계에서 길동이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집을 나와 도적의 괴수가 되어 힘을 가지게 된 길동은 자신을 거부한 조선사회와 대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대치는 그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조선왕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결국 길동은 능력을 왕에게 인정받지만 그의 능력이 수용되지는 못한다. 그가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택한 방법이 조선과의 대립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은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결국 왕을 능가하지만, 그 자신의 가치관이 유교적 윤리관에 얽매여 있고, 입신양명이라는 그의 목표 자체가 조선사회에 인정을 받지 못하면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이 뜻 한 바를 성공시키지 못한다. 때문에 그는 율도국으로 무대를 옮겨 자신의 자아를 실현시키기 위해 힘쓴다. 


율도국은 조선에서의 신분상승에 실패한 홍길동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마련된 대체적인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이곳은 조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공간이다. 때문에 이 공간에서 길동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욕망을 분출한다. 

조선사회에서는 왕에게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교묘한 심리전을 쓰는 등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고 유교적 윤리관에 얽매여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때문에 율도국과 명분 없는 전쟁을 벌이는 등 목표에 다가가는 방법이 더욱 직접적이고 폭력적이다.


결국 홍길동은 율도국의 왕이 됨으로써 입신양명의 꿈을 이룬다. 하지만 홍길동 자신을 진정한 자아실현자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길동은 목표에 접근하는 과정이 이기적이고, 아집과 독단에 휩싸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는 폐쇄적인 성격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향으로 설정되어진 율도국이 아닌 현실사회에서는 자신의 가치관에 얽매여 아무것도 이룩한 것이 없고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낸 목표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거에 이루지 못한 목표에 집착해 스스로 조선의 왕에게 예속되기를 원함으로써 사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이상의 의견을 정리해보자면 홍길동은 타고난 능력으로 신분적인 제약을 극복했지만, 그 극복과정이 기만에 차 있기 때문에 도덕적인 영웅으로는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자신이 이룬 것 보다는 과거에 실현시키지 못한 목표에 집착함으로써 진정한 자아실현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으로 홍길동 개인의 성격 분석을 통해 소설 속 각 사건의 인과관계를 살펴보았다. 

이번 기회를 통해 문학과 인문과학의 접점을 찾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이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고전소설 속 영웅의 모습을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하다보니 사실 좀 억지스럽고 딱딱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저자의 역량부족으로 홍길동의 성격분석을 수집한 자료에 주로 의존한 것 같아 많이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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