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숲으로 가는 길] 4부 - 숲의 길을 걸어봐요

19화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 1

 

이 글에는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싶은 사람의 심리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글에 민감함을 갖고 계신 분은 이 글을 보시는 것을 자제해주세요.

 

 

“죽고 싶다.”
“정말 간절하게 죽고 싶다.”

나는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하루에도 수천 번 생각했다. 저번에 그 연예인은 어떻게 죽었다고 했지? 알아봐야겠어. 집은 좋지 않겠어. 레지던스 주인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집에서 죽고 나면 우리 집 식구들은 집을 잃는다. 

시기는 언제가 좋은가. 봄 아니면 가을 겨울이 있다. 여름은 안된다. 내가 조금이라도 부패한 채로 발견되는 건 원치 않는다. 돈은, 돈은 얼마나 있나. 장례식 치를 만큼은 없다. 장례식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엄마는 하겠지. 가장 가까운 화장터가 어디에 있지? 며칠 전부터 예약이 되는 거지? 죽자고 생각하면 의외로 할 일이 많다. 

유서는? 써놨다. 수없이 썼다. 특히 엄마와 아빠는 몇 차례를 퇴고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고쳤다. 화가 나서 ‘이게 전부 당신들 탓이다.’라고 질러놓았다가, 먹먹한 마음에 내가 다 미안하다고,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된 인연이었다고 고쳤다. 어느 버전을 남기고 죽는가는 죽기 직전 나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소소하게 나에게 남은 물건들은 K가 알아서 치울 것이다. 나에게 의지가 되어주려고 K가 많이 노력했는데, 가족보다 K에게 가장 미안하다. 평생 마음의 문을 닫고 살겠지. I도 문제다. 많이 울 것이다. 자책도 많이 하겠지. 아직 서툴고 거칠은 아이라서 자해할 수도 있다. 이 점은 I부모님께 잘 살펴보라고 남기고 가야 한다.

식물은 모두 말라죽겠지, 강아지는 K와 I가 담당할 것이다. 하루는 K가 생강이는 I가 데려가겠지. 부디 갑자기 사라진 나를 애타게 찾지 않으면 좋겠다. 모두.

 

나는 사소한 자해의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물론 자해를 하는 사람의 심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 흔적 없이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조용히, 어디에선가 죽은 듯이 살다가 죽어버리는 게 목표였다.

내 삶은 죽는 것이 목표였다. 이런 희극도 비극도 아닌 일 사이에서 나는 유랑단의 피에로처럼 다른 모습의 나로 밝고 나름 강단 있게 살아왔다. 시니컬했지만, 내 표현으로 인해 누군가 상처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잔정이 많아서 많은 사람을 애써 끌어안으려 했지만, 그다지 그것도 성공한 것 같지가 않았다. 

 

꽤 어렸을 때부터였다. 나는 방치되었고, 이용되었고, 나이에 비해 너무도 큰 책임감을 가져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무 힘들었고,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왜 나는 살아있는 거지?”라는 나의 물음에 그 어느 누구도 답을 주지 않았다. 

단 한번, 중학교 때, 새벽이었다. 저녁시간에 엄마에게 험한 얘기를 듣고 식구 중에서 외톨이로 밥을 굶어야 했던 날 밤이었다. 나는 너무도 외로웠고, 우는 소리를 죽이고 울고 있다는 것 자체가 더욱더 외로웠다. 가위가 보였고,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긋고 마저 울었다. 다음 날 같이 등교하는 꽤 친한 친구에게 보여주며 위로받고 싶었는데, 친구는 화가 나서 나를 버려두고 학교로 먼저 가버렸다. 나는 지금도 그 친구가 왜 나를 버려두고 먼저 뛰어갔는지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나의 짐작으로는 어린 나이에 친구가 ‘죽고 싶다’는 감정을 가진 것을 알게 된 것이 너무 당황스럽고 무섭지는 않았는지 짐작해본다. 그렇다면 그런대로 미안한 일이다.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웠고, 나를 죽이려 했다. 

그런 나는 나를 피해 자꾸 살아났다. 아마도 본능적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나를 잡았던 것 같다. 또 내가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들 중 첫 번째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죽고 싶은 마음이 들면 다 소용없다고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언니 P를 만나고 나면 나에게 살아갈 에너지가 생겼다. K와 I는 말할 것도 없었고, 친구 T는 만나서 서로 별 다른 대화도 안 하는데 그저 그게 참 좋았다. F모임은 언제든 마음이 맞으면 만남을 갖곤 했는데, 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어서 나에게 본이 되어주곤 했다. 

두 번째 이유는 너무 늦었지만, 적당한 병원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통제하는 게 지쳤을 때 병원을 검색했고, 더 늦기 전에 병원을 찾았다. 내가 예상한 정신병원은 과한 리액션에 더 과한 오지랖을 부리는 의사가 존재하는 곳을 상상했다. 처음 만난 의사 선생님은 예상보다 건조했다. 나는 그 점이 참 좋았다. 그렇다고 쌀쌀맞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하면 적당히 공감해줬고, ‘어쩌면 좋을까요?’라고 던지면 전문적인 이야기를 보태 줬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가출’이다. 물리적인 거리감이 나를 살게 했다. 나를 푹 자게 해 줬고, 안전함을 느끼게 해 줬다. 서른이 넘어서 ‘가출’이 아니라 ‘독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가출’이었다. 싸우고 소리 지르고 쓰러지는 각자의 진창을 마주하며 헤어졌다. 일방적으로 내가 나왔다. 한 마디의 통보 없이. 상처를 주고받은 상태 그대로.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고, 나는 더 강해졌다. 내가 가장이었고, 내가 모든 것을 정하고 좋아하는 것을 들였다. 피곤한 나를 받아줄 집이 존재했고, 그 집 안에는 불안도, 언어적 폭력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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