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숲으로 가는 길] 4부 - 숲의 길을 걸어봐요

20화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 2

 

집을 나온 뒤에 죽고 싶지 않아졌던 것은 아니다. 우울은 여전히 힘이 세서 나를 뒤흔들었다. 특히 병원에서 상담을 한 날은 감정 소모를 많이 해서였는지 많이 지쳤다. 내 힘들 때의 감정을 끌어내서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굉장히 소모적인 일이다.

어떤 날은 상담에서 오해가 있는 말을 듣고, ‘아, 역시 내 잘못이구나’ 싶은 마음에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운 적이 있다. 울다가 와인이 있다는 게 떠올랐고, 많이 마셨다. 그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늦은 저녁이 다가왔고, K와 I가 술 마시고 울고 있는 구석에 앉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같이 울어줬고, 술 마시고, 울었던 것에 대하여 한 마디도 탓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선생님과 소통이 잘못된 것 같다며, 그것에 대해 다음 상담에 언급할 것을 추천했다. 나는 그러마 했다. 다음 상담이 다가왔고, 용기를 내서 언급했다. 

“선생님께서 지난 시간에 △△△이라고 하신 것에 너무 상처 받아서 많이 힘들었어요.”

“아, 저는 ◇◇◇을 설명하느라 △△△이라고 언급한 것인데, 오해할 수 있었겠어요. 다음엔 표현을 다르게 할게요.”

쉽게 오해는 풀렸고, 선생님은 아마 내 감수성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셨을 것이다.

 

상담을 하며 안 맞는다고, 병원을 바꾸는 것은 개인적으로 찬성하는 편이다. 하지만 당당하게 상대방에게 당신의 ◈◈◈한 말 때문에 상처 받았다고, 언급해보자. 그리고 선생님의 반응에 따라 판단을 하자. 

의사 선생님도 사람이다 보니 코드가 맞는 선생님이 어딘가 있기 마련이다. 너무 좌절하지 말고, 나는 나만의 병원 투어를 하는 것을 추천한다. 잘 맞는 선생님을 찾고, 안착하고, 적당한 상담을 받으면 시너지가 배가 된다. 한두 번의 시도에 좌절하고 포기하지 말자. 

 

상담 중에 공황장애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선생님은 급박한 상황이 오면, 가장 좋았을 때를 떠올려보라고 하셨다. 순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울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겨우 생각해낸 장면은 전년도에 초여름에 속초로 K와 I가 함께 한 짧은 여행이었다. 우리는 휘파람 소리가 어울리는 한적한 바닷가에 멈춰 섰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바다를 바라보는데, 자꾸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그 와중에도 이렇게 행복한 날 죽는 게 좋지 않을까. 하며,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추억이 가득한 내 편인 사람 둘을 옆에 두고 내가 할 적절한 생각은 아니었다. 죽음은 내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고요한 그곳으로 걸어갔다. 모래가 내 발을 붙잡듯이 걸음을 무겁게 했다. 바다가 코앞에 들이치는데 어느새 K가 내 뒤에 와 있었다. 그래. 나는 지금 행복해. 반복해 말하며 차로 돌아가 앉았다.

눈물을 숨기고 잠으로 도피했다. 나는 주로 잠으로 도피했다. 죽음이 나를 흔들면, 흔들수록 잠에 들었다. 깨어난 나는 조금이라도 덜 죽고 싶기를, 자는 동안 생긴 에너지가 나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느 날, K와 I 그리고 T에게 집에서 얼마나 체벌을 받았는지 물었다. K는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I는 밥투정이 심해서 단 한 번 있다고 했다. T도 그다지 없었다고 대답했다. 너무 놀라서 선생님께 여쭤봤다. 선생님은 체벌은 물론이고 잔소리도 거의 들을 일이 없었다고 하셨다. 

나는 항상 체벌에 노출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 부모를 이해할 수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수록 그 어린아이의 작은 몸에 때릴 곳은 없다는 확신을 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은 내가 맞을 숫자를 스스로 정하라는 요구도 들었다. 나는 그때 그냥 죽는 게 편할 것 같은 욕구가 들었다. 

30대 엄마의 건장한 몸을 대상으로 6세 정도의 아이가 자기가 맞을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살고자 하는 욕구와 같은 것이다. 이번에 맞지 않으면 보호자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 같은 것이었으리라. 나는 나이가 들수록 미취학, 초등학생 나이에 그렇게 맞을 만큼의 잘못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아니, 인간은 맞아선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누구도, 누구에게도.
 


엄마는 지체장애가 있는 사촌언니를 만나러 정기적으로 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 전날 종아리가 까매지도록 멍이 들게 맞았다. 나를 데리고 간다고 무릎까지 오는 두껍고 새하얀 스타킹을 신겼다. 무더운 초여름이었고, 나는 욱신거리는 다리를 뒤뚱이며 무서운 엄마 뒤를 쫓아다녔다. 죽음은 늘 내 곁에 있었다. 더, 더 힘들고 외로워지면 죽으면 된다는 탈출구 같은 것이었다. 전부 내가 택한 삶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다 커서, 엄마에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기억을 못 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체벌 이야기만 나오면 이 이야기를 반복해 말했다. 엄마는 주입식으로 외우듯 들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남겼다. “내가 살기 힘들어서 너를 참 많이 때렸지…” 그 날 이후 나는 엄마에 대한 존경을 그만두었다. 

 

나는 사실 그녀의 삶의 모든 점을 연민한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학대한 것을 자기 연민으로 소화하는 그 점만은 소름이 돋았다. 나의 마음은 그녀를 점점 밀어냈고, 결국엔 낯설게 까지 만들었다. 

어릴 적 제대로 사랑받아본 적 없는 나는,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의심했다. 계속 확인받고 싶어 했다.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의 싸움에도 모래가루처럼 부서졌다. 그러고 나면 죽고 싶어 졌다. 나는 사랑에 대해 근본이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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