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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마음을 읽다] 이태원 클라쓰 - 존재론적 영웅들의 전장

기사승인 2020.07.06  08: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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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본문에는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코로나 19라는 대재앙이 우리에게 다가온 지도 반년이 넘어간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쌓아온 문명과 의학발전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것은 우리 주변을 휩쓸어버렸다. 당연한 것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평안하고 변화 없는 삶이라는 것은 세상의 그 수많은 역동적인 위기와 기회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맞아떨어졌을 때나 가능한 아주 짧고 기적적인 상태였다. 사람들은 말한다. ‘뉴 노멀(new normal)’을 준비하라고. ‘노멀’을 겪어보고 이해한 어른들이야 준비할 생각이라도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 세대들, ‘노멀’을 겪어보지도 않은 이들은 대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한다는 말인가?

젊은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허무주의에 빠져있다. 10대와 20대와 같이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심하다. 세상에 대한 그 어떠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채로 격동의 시대로 던져져 버린 청년들. 다가올 미래가 과거와는 너무나 다르기에 어른으로부터 배우지 못한 아이들, 파괴된 전통과 상식의 잔해 속을 헤매는 실존적 고아들. 

이들은 헤매다 지친 나머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세상에 정해달라고 부탁한다. 삶의 원동력이어야 할 내 삶을 위한 발걸음은 ‘노오력’이라는 자조가 되어버렸고, 사는 동네와 아파트에 따라 미래의 꿈과 전망도 일찌감치 정해져 버린다. 국가에서 정하는 정책 한 번에 오랜 시간 준비해온 미래는 한순간에 뒤집어져 버린다. 선호 직업 1위가 공무원이고, 그 이유가 일의 보람이 아니라 안정적인 직장과 연금이라는 씁쓸한 결과는 이들이 다가올 세상을 얼마나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N번방 사건과 젊은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이 보여주듯이 인생의 의미가 있어야 할 자리를 뒤틀린 욕망과 삶에 대한 이른 포기가 채워가고 있다.

 

이러한 이들이 전과자 출신에 중졸의 고아,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고집불통의 허름한 포차 주인 ‘박새로이’에 열광한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다. 웹툰으로 시작된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JTBC 드라마 역대 3위를 석권하고,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이 드라마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시작된 복수물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답습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존재론적인 고민을 담는다. 이 드라마는 묻는다. 과연 소신이란, 자신의 삶의 방식이란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제 삶의 주체가 저인 게 당연한, 소신에 대가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박새로이

“소신, 패기. 없는 것들이 자존심 지키자고 쓰는 단어.
이득이 없다면 고집이고 객기일 뿐이야.”

-장대희
 

 

원칙과 소신에 목숨을 거는 소년 박새로이는 고등학교 전학 첫날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 장가 회장의 아들 ‘장근원’을 만난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약자를 괴롭히는 근원에게 새로이는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고,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장가 회장 ‘장대희’ 노인의 제안을 거부한다. 거부한 이유는 단 하나,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아버지와 첫사랑을 한 번에 잃고, 중졸 전과자 신분이 되어 경찰이 되는 미래마저 빼앗기게 된다.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잃게 된 운명의 그 날을 새로이는 결코 잊지 못하였다, 모든 것은 단지 무릎 한 번을 꿇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2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다시 7년간의 선원 생활 이후 새로이는 첫사랑과 다시 만나게 된 자유로운 거리 이태원에 조그마한 가게 <단밤>을 차리게 된다. 사업에 초보였던 그는 새롭게 만나게 된 동료들과 여러 고난을 헤쳐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가 겪게 되는 대부분의 위기 뒤에는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박새로이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한 것을 잊지 못하고 끝내 그를 무릎 꿇리려는 장가 장대희 회장의 음모와 모략이 있었다.

 

결국 이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려고 하는 박새로이와 그 소신을 꺾고 자신의 인생관인 ‘약육강식’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장회장의 대결에 있다. 박새로이는 장회장을 잊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도 된다. 장회장의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가진 것도 없는 박새로이를 굳이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고 굴복시키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착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대결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인생관을 건 대결이며, 여기서 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부정당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옆에서 본다면 괜한 고집과 객기로 보이지만 자신의 소신에 목숨을 건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건 대결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박새로이가 극 중에서 겪는 모든 도전들에서 그는 항상 자신의 소신을 시험당한다. 그가 겪게 되는 대부분의 위기에서 그의 곁에는 대부분 소신을 한 번만 꺾으면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이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마련되어 있었다. 미성년자에게 속아 술을 팔았다는 이유로 영업정지를 맞게 되었을 때에도 장회장의 아들 장근원은 그것을 무마할 수 있는 방법을 들이대며 유혹한다. 박새로이의 동반자로 새로 등장한 이서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장사가 잘되길 위해서 낙오된 동료들을 버리고 능력 위주의 인선을 할 것을 종용한다. 

애초에 박새로이는 처음부터 가게를 열만한 자금 또한 있었다. 그러나 그 돈은 아버지의 사망보험금이었기에 그는 그 돈을 ‘끝장나게 의미 있게’ 쓰기 위해 훗날 장가를 무너뜨릴 자금으로 남겨놓고 7년의 세월을 더 들여 원양어선에서 돈을 모아 가게를 연다. 눈 앞에 보이는 빠르고 편한 길을 포기함으로써 그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고 그의 목표인 장가에 대한 복수는 한없이 멀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 
 

“지금 한 번만 참고 넘어가면...”

“지금 한 번, 지금만 한 번, 마지막으로 한 번. 또또 한 번.
그 한 번들로 사람은 변해가는 거야. 영업정지, 그런 건 별일 아닌 거야.”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中>

 

현실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는 사회부적응자이자 어린 꼰대이다. 그러나 그가 우직하게 자신다움을 버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앞날을 지켜보고 싶게 만든다. 왜냐하면 눈 앞의 한 번의 도태를 피하기 위해 소신을 꺾고, 꿈을 포기하고 당장 보이는 세상의 규칙을 따라가라는 장가 회장의 압박에 우리는 매일 굴복할 것 같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그는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지친 젊은 영혼들을 자극하는 존재론적인 영웅이다.

오늘날 그 누구도 삶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꿈에 집착하다가 맞게 되는 멸망에 대한 동물적인 공포이다. 지진을 피하는 동물들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잠깐의 이득을 보았을 때 득의양양하다가 예상치 못했던 난관을 만나면 세상의 거대함과 자신이 물고 태어난 수저에 대하여 탄식하고 신분하락과 몰락의 공포에 떠는 의미와 존재의 고아들인 우리들이다. 그렇기에 날지 못하는 인간이 새를 동경하는 것처럼 끊임없는 도전에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는 부적응자 박새로이의 성공기를 겉으로는 완전 만화 같다고 웃어넘기면서도 남몰래 동경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정신분석가들은 인간의 정신을 끊임없이 분리하고 해체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정신을 해체하고, 동기를 거슬러 올라가 유아기 시절까지 올라갔다. 그러자 남은 것은 억압된 성욕과 공격성, 그리고 열등감이었다. 이들은 외쳤다. 나는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결론지었다. 인간은 결국 똑같다고. 인간의 정신은 결국 환경과 반사(reflex)에 의해 결정되는 사물에 불과하다고.

어떠한 정신분석가들은 식사가 박탈되고, 안전이 박탈되고 삶이 박탈된 수용소에서 인간을 관찰하였다. 인간의 본질이 성욕과 공격성, 열등감과도 같은 반사로 구성되어있다면 인간이 보이는 행동은 전부 똑같아야 했다. 그러나 그 삶과 죽음의 극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남을 짓밟으며 발버둥 쳤고, 누군가는 소중한 식량을 남에게 양보하였다. 누군가는 일찍 절망해버렸고, 누군가는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의미대로 살았다. 자신의 인생의 영웅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결론지었다. 인간은 전부 다르다고.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결정하지만 인간의 정신만은 스스로가 자신의 의미를 결정하였다고. 

 

박새로이와 장회장의 주변 인물 군상들 또한 존재론적인 투쟁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이의 연인 이서는 자신에게 투영된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새로이와의 사업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 욕망과 의리 사이에서 흔들리는 새로이의 첫사랑 ‘수아’와 장회장의 서자 ‘근수’,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폭력조직 출신 ‘승권’, 그리고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고민하는 ‘현이’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자신의 삶의 의미를 세상으로부터 찾을 것인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다. 그리고 작가는 새로이의 입을 빌려 젊은 세대들에게 고한다.
 

“도망쳐도 돼.
아니지. 도망이 아니지. 잘못한 게 없잖아. 그치?
네가 너인 것에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필요 없어.”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中>

 

극의 마지막, 장회장과 박새로이의 대결의 결말에서 주제의식은 더욱 확대된다. 극이 시작된 이래로 박새로이의 인생은 두 명의 상반된 아버지에게 묶여 있었다. 새로이의 신념, 인간애, 사랑의 원형이자 아이러니하게도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희생되어 버린 친아버지. 또한 자신의 사업적 야망의 원형이자 자신의 신념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그렇기에 오히려 삶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해 준 뛰어넘어야 할 제2의 정신적 아버지 장회장. 한 명은 긍정적이고 완벽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었고, 다른 한 명은 극복해야 할 너무나도 부정적인 아버지상을 보여준다. 신화에서 영웅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내재화하고, 부정적인 아버지를 극복해낸다. 

 

그러나 작가는 새로이가 고대 신화의 영웅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인공이 현실 속의 영웅이 되기를 바랐다. 현실 속의 영웅이란 긍정적인 아버지와 부정적인 아버지 그 모두를 뛰어넘고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의 주체가 되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정하라는 것을 강변해왔던 박새로이야말로 극 전체를 통해서 가장 자유롭지 못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가게 단밤이 역설적으로 표현했던 기나긴 쓰디쓴 밤에서 새로이의 인생은 없었다. 남들에게는 도망쳐도 된다고 말해왔던 그가 자신만은 눈물을 참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끄떡없다고 되뇌며 그 자리에 선 채로 스스로를 납득시켜 왔다. 그래서 이태원 클라쓰의 종반부는 박새로이와 장회장의 대결로 그치지 않는다. 박새로이는 자신의 삶을 얽매어 왔던 친아버지와 장회장 모두와 대결한다. 

사고를 당해 생사의 갈림길 위에서 헤매며, 단 한 번의 무릎을 꿇지 못하여 모든 것을 잃은 그 날로 돌아가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이며, 새로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다. 끄떡없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힘들었다고. 누군가를 미워하며 평생 살아가는 것이 버거웠다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의 죽은 아버지는 자신을 따라가 편해지자고 무언으로 말한다. 그러나 새로이는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생을 지속하기로 한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남은 밤이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어느새 자신만의 사람들이 생겼다. 혼자 남은 쓴밤에서 내가 찾아낸 사람들과 함께하는, 내일이 기대되는 단밤이 되었다. 아버지가 주고 간 것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것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이는 아버지를 따라가 편해지는 대신 고통 속의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고 말한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보낸 박새로이는 이제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난다.

 

납치된 새로이의 연인 이서의 행방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장회장은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10년 전의 그날처럼 자신에게 무릎을 꿇을 것을 요구한다. 새로이는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의 소신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사랑하는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 주저 없이 원수인 장회장 앞에 무릎을 꿇는 새로이. 그의 선택은 미워하는 사람에게 증오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과 함께 증오의 연쇄에서 벗어나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낸 새로이에게 과거의 주박은 그 어떠한 패배감도 주지 못한 채 스러져 버린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끝내 이겼다며 득의양양해하는 장회장에게 박새로이는 신랄한 말을 날리며 이별을 고한다.
 

“나의 인생을 지옥에 처넣은 사람. 하지만 동시에 대단한 남자.
가치관은 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적. 저는 당신의 뒤를 쫓아온 생을 걸었었죠.

그런 남자가 고작 인질극에 기대어 무릎을 꿇어라?
한스럽습니다. 십수년이 지난 오늘에야 당신을 알았습니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中> 


자신의 인생은 아버지에게 저지른 잘못을 보상하기 위함이 아니었고, 증오하는 상대에게 복수하고 사과를 받기 위함도 아니었다. 생은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살아내는 것. 청년은 꿇었던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만의 길로 다시 달려가고, 홀로 남은 장회장은 패배감과 허무함에 몸부림친다. 이렇게 새로이는 서로의 가치관을 건 대결에서 승부를 초월한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자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고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어떤 의미로는 더할 나위 없는 복수였다. 이태원의 자유를 동경했던 청년은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나의 존재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워버릴 수 있는 거대한 세상의 흐름 앞에 나의 삶의 방식을 당장 바꾸느냐, 아니면 10여 년간의 저항과 고민 끝에 결국은 나의 삶의 방식을 바꾸느냐. 보기에 따라서는 같은 결말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비웃으며 물어볼 수 있다. 이제 만족하냐고. 그래서 결국 뭐가 남더냐고. 존재론적 영웅인 새로이는 담담하게 대답할 것이다.
 

“인간이 남았습니다. 나 자신이 삶의 주체인 것이 당연하고,
소신에 대가가 필요 없는 삶을 사는 그런 인간이 남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돈을 스스로 탕진해버린 사람은 다시 일어나 돈을 벌러 나간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맡겨놓고 사기당해버린 사람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속인 사람을 원망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것만을 책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를 추구한 삶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값진 선물을 준다. 내가 선택했기에 넘어져도 원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힘, 그리고 그 의미를 관철하면서 얻어내는 새로운 의미. 그 새로운 의미가 삶의 고아인 우리를 다시 걷게 만든다. 진정한 성장을 이루어내 삶의 주도권을 찾은 나의 환자들이 내 곁에 머무르는 경우는 없다. 이들은 의사인 나를 뒤로 하고 새로운 의미를 향해서 자신들만의 전장으로 떠나곤 한다. 서운해하기에는 이들의 뒷모습에서 보이는 삶의 역동성이 너무나 눈부시다. 

세상이 당신의 의미를 정하게 놔두지 말아라. 금수저니 은수저니, 노멀이니 뉴 노멀이니. 당신 말고 대체 누가 당신의 노멀을 결정한단 말인가? 우리는 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를 물고 태어났다. 당신이 당신인 것에 다른 사람을 납득시키려 하지 말아라. 당신 말고 누가 당신을 패배자로 만들겠는가? 당신 말고 누가 당신을 승리자로 만들겠는가? 당신이 세상 속에 내던져져 뜨겁게 지져지고, 거세게 때려지고, 깊은 어둠에 가두어지는 이유는 모나지 않은 매끈한 몽돌이 되기 위함이 아니다. 당신 안에 있는 다이아를 찾기 위함이다.

그러니 살아라. 삶 당하지 말고,
살아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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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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