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 마음 가는 대로

[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염지연 전문의]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인 A양은 요즘 남자 친구 B군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동갑내기 B군은 철이 없기는 해도 정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데 거친 아이들과 사귀면서 성적도 떨어지고 성격도 점점 난폭하게 변해갔다. 화가 나면 안 하던 욕설을 퍼부을 때도 있었다. 스트레스가 많아 그런가 했는데,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듯했다.

하루는 마음 단단히 먹고 그러지 말라고 야단을 쳤다. 그랬더니 갑자기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순식간이었다. 코피가 났다. B군은 화장지를 던져주며 닦으라고 말한 뒤 사라져 버렸다. 

‘내가 저런 양아치 같은 놈하고 사귀었다니 정말 어이가 없네. 이제 정말 끝장이야.’

이후 A양은 B군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B군에게서 문자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 나 계속 안 만나주면 네 아빠 엄마한테 우리 사귀었던 거 일러바칠 테니 그리 알아.’

B군을 다시 만날 수도 없고, 안 만날 수도 없어서 A양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사진_픽셀


데이트폭력이 연인 관계인 성인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라면, 10대들의 데이트폭력은 커플 사이인 10대 청소년 남녀 간에 일어나는 폭력을 가리킨다. 데이트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는 것에 반해, 10대들의 데이트폭력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은 채 여전히 수면 아래 잠복해 있는 게 특징이다.

학교 밖에 있는 일부 청소년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10대는 중고등학생들이다. 이들이 이성 친구를 사귀는 방식은 이중적이다. 또래 친구들에게는 자기도 이성 친구를 사귄다며 공공연히 자랑하지만, 부모나 가족에게는 철저하게 숨긴다. 한국인의 정서상 10대들의 이성 교제를 관대하게 바라보고 허용하며 인정해주는 부모는 극히 적기 때문이다. 위 사례의 여학생 역시 이 같은 고민이다.

이런 폐쇄성이 10대들의 데이트폭력을 더 음성적으로 만들고,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 요인이다. 10대들의 범죄가 성인들 못지않게 잔혹해지는 것과 비례해서 10대들의 데이트폭력 역시 그 정도가 흉악해지는 경향이 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를 악용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거친 말부터 시작해서 점점 심한 욕설을 내뱉다가 손과 발로 툭툭 치는 수준의 폭력이 따귀를 때리고 주먹을 날리는 폭력으로 변모한다. 이런 폭력의 진화는 무자비한 폭행, 감금, 협박, 갈취, 스토킹, 성추행, 강간, 살인으로까지 비화한다. 

 

10대들의 이성 교제는 성인들의 연애 방식을 답습한다. 데이트폭력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나 영화, 인터넷 등에 등장하는 폭력의 일상화가 청소년들에게 여과 없이 주입되는 것이다.

인기 드라마나 유명 영화에서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벽에 거칠게 밀어붙인 다음 상대방 동의도 없이 강제로 키스를 퍼붓는다. 엄청난 데이트폭력이지만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이를 본 청소년들은 나도 저렇게 한번 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연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자 상대방 여자의 팔목을 거세게 잡아끌고 차에 태운 뒤 어디론가 사라지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 매우 로맨틱하게 그려지며 버젓이 전파를 탄다. 화가 난다고 상대방 뺨을 때리거나 물을 끼얹는 장면은 비일비재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완력을 쓰는 것이 마치 박력 있고 멋진 남자인 양 묘사되는 것이다. 이처럼 폭력이 용인되고 미화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10대들에게 그대로 투사되어 데이트폭력으로 연결된다. 

 

10대들의 데이트폭력을 없애거나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피해자의 현명한 대처도 필요하지만, 부모, 가족, 교사 등 피해자 주변에 있는 어른들의 노력이 한층 더 중요하다. 

A양의 아빠 엄마와 같은 태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벌써 연애질이나 하고.” “대학만 가면 얼마든지 멋진 사람 만날 수 있으니 참아.” 이런 말은 10대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부모들도 중고등학생 시절 이성 친구를 만나기 위해 밤새 연애편지를 쓰며 가슴 설렌 적 얼마나 많았는가?

10대들이 부모와 가족과 교사에게 이를 알리고 건전하게 만남을 이어갈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준다면 음성적 교제를 통해 데이트폭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 데이트폭력이 발생했을 경우, 피해자는 이를 숨기거나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부모나 가족, 교사 등 믿을 만한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혼자 해결하려다가 자칫 가해자의 꾐에 빠져 끝없이 요구를 들어주거나 추가적인 폭력에 시달릴 수 있다. 미성년자는 성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존재라서 미성년자다. 부끄러울 게 없다.

주변에 믿을 만한 어른이 없거나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게 ‘청소년사이버상담센터’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연결하면 24시간 신고를 하거나 상담을 진행할 수 있다. 전화는 국번 없이 ‘1388’로 연결이 가능하다. 

 

데이트폭력 피해자 중에는 가해자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 피해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이로써 타인에 대한 통제능력을 행사하는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다. 이를테면 “너는 나 아니면 아무도 만날 수 없을 거야”라는 말을 반복해서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을 무력하게 만든다든지, “네 주변 사람들은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만 하니까 누구 말도 믿지 마”라고 세뇌함으로써 피해자가 외부에서 객관적인 조언을 들을 수 없도록 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폭력도 명백한 데이트폭력이다.

 

10대인 내 아들과 딸이 이성 친구를 사귀고 있다면 부모로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연애 감정 때문에 홍역을 앓고 있는 내 아이에게 나는 무슨 조언과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 아이가 만약 데이트폭력의 가해자라면 혹은 피해자라면 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10대들의 데이트폭력은 남의 문제가 아니다. 옆집만의 일이 아니다. 다른 아이들의 경우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내 문제일 수 있다.

부모라고 해서 모든 상황에 완벽한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평소 아이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존중하며 배려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인격적인 태도가 일상에 배어있다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신과 타인이 폭력에 노출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내 아이가 이성 친구를 만나고 있다면 언제든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 수 있게끔 관심과 사랑의 신호를 보내주는 게 좋다.

 

*  *  *
 

정신의학신문 마인드허브에서 무료 마음건강검사를 받아보세요.
(20만원 상당의 검사와 결과지 제공)
▶ 자세히보기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