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23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엄마가 아프시면서 첫 취업과 동시에 가장 생활을 했습니다.

엄마가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엄마, 동생, 제가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왔기 때문에 그때부터 우울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직장에 들어가고 기숙사에 있으면서 외로움과 공허함 때문인지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서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아프셨고 제가 버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세 식구가 생활을 했던지라 거기에 사고 친 빚까지........ 자연스럽게 빚이 불게 되었고 저는 첫 직장을 나와 다른 직장을 구하고 금전적으로 힘들게 살았답니다. 한 직장에 맘을 오래 붙일 수 없었고 옳지 못하다 싶으면 참지 못하고 분노조절도 안돼서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지 못하였습니다. 여차저차 10여년간 한 업계에 있었지만 결국 마지막 직장에서 한 달 일하고 제 발로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다른 업계로 옮겨 일해보려 했지만 잘리거나 버티지 못하거나 방황하다가 우연히 들어간 회사에서 1년 정도 일했습니다. 그마저도 코로나로 권고사직을 당해서 지금은 실업급여를 받고 있습니다. 실업급여를 혼자 받는 것도 아니고 힘든 사람들이 많을 텐데 저는 더 이상 나를 뽑아주는 곳이 없을 거란 두려움과 이제 뭘 해야 하지 하는 막연함 때문에 무기력하고 우울감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길거리를 걷다가도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빚은 그대로인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습니다. 자격증 공부한다고 책도 샀지만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죽고 싶고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도와주세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오랜 시간 동안 직장문제와 금전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어 오셨군요. 미래가 보이지 않고 죽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혹시 그 괴로움 자체가 지금 질문자님을 점점 더 심한 좌절로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어 걱정이 됩니다.

 

만악의 근원은 다름 아닌 '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의 모든 애환들도 결국은 돈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들과 엉겨 붙어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질문자님께서 '실업급여를 혼자 받는 것도 아니고, 힘든 사람들이 많을 텐데'라고 말씀 주신 것처럼 취직 걱정은 우리 사회 전체의 숙제와도 같은 문제입니다. 그것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끔찍한 숙제입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실업의 문제로, 빚의 무게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걱정되는 것은, 어쩌면 질문자님 문제의 근원은 단지 그것만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빚을 갚지 못해서, 안정적인 직장을 잡지 못해서, 돈을 잘 벌지 못해서 생기는 고민들보다 좀 더 깊숙한 무언가, 바로 질문자님 마음속의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염려가 됩니다.

 

대체 뭘 해야 하지 하는 막연함,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좌절감, 그 뒤에는 사실 두려움이 놓여있습니다. 지금의 이 무게를 결국 내가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봤자 끝내는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 미래에 대한 기정사실화, 그리고 그 미래에 압도되어 현재의 내가 지레 마비되어 버리고 마는 악순환의 동력이 바로 그 두려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깨에 짊어진 것들을 모두 떨어뜨리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러면 질문자님의 그 어깨 위에는 과연 무엇이 올려져 있는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의 생계, 아프신 어머니의 치료비, 사기당한 빚 등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나라 청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무게들-나의 미래, 꿈, 결혼, 행복 같은 것들보다는 가족과 빚이라는 현실의 무게가 질문자님에게는 더욱 강렬해 보입니다. 아니, 그 현실에 가리어져 응당 걱정해야 할 질문자님 본인의 삶과 꿈은 보이지조차 않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23세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같은 또래들과 비교했을 때 집안의 가장으로서 돈을 버는 모습이 제일 보편적인 모습은 분명 아닙니다. 23세면 공부를 하거나, 여행을 다니기도 하는 나이이며, 돈을 벌더라도 혼자 사는 비용만 감당하는 것이 더 흔한 모습일 것입니다. 질문자님 또한 23세부터 이혼가정의 가장으로 생활해온 지금의 모습이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삶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질문자님이 짊어져야만 했던 현실의 무게가 너무 과도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감당하기 너무 벅찬 현실의 무게를 떠안게 되면 사람들은 보통은 어떤 감정이 들까요. 우선 두려울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이거 때문에 나의 인생은 망가지는 것이 아닐까. 지쳐 쓰러지고 결국 모두가 파멸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두려움 밑에는 '분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 나지?'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 하지?'라는 분노가 올라올 수 있습니다. 이혼한 부모님, 아픈 어머님을 향한 분노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벅찬 상황 자체에 대한 분노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픈 어머니에게 화를 낼 수는 없습니다. 내가 실수하여 빚까지 졌는데 화를 낸다는 것은 적반하장 같기도 합니다. 화를 내는 것은커녕 스스로 화가 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조차 어려워집니다. 결국 분노의 대부분은 무의식 속으로 꾹꾹 억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 두려움만이 홀로 남아 더욱 강렬해집니다. 두려움은 불안으로, 불안은 위축으로, 위축은 좌절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시작되고야 맙니다.

 

짧은 게시글만 가지고, 질문자님 속마음을 결코 제가 함부로 짐작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한 내용들도 근거 없는 저의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질문자님의 문제가 점점 나선을 돌 듯 아래로 깊어지기만 하는 과정이 분명 질문자님 마음의 문제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입니다.

한 직장에 오래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자꾸 그만두게 되는 과정, 계속하여 취직은 되는데 결국은 스스로 박차고 나오게 돼버리는 패턴, 직장에서 감정을 참지 못하고 분노조절의 문제로 퇴사하게 되는 패턴의 반복에는 분명 질문자님 마음 어딘가에 해결되지 못한 어떤 응어리가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질문자님을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짓누르는 것의 진짜 정체가 '돈'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찾아내고 다룰 수 있어야 질문자님의 지금 이 좌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동안 실패했던 사건들을 병렬식으로 적어두고 하나씩 비교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건들 사이의 공통점이나 그 기저에 숨어있던 나의 감정은 무엇인지, 그 감정의 근원은 무엇인지를 찾아나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여 상담을 통해 그 과정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가장 손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 스스로 돌보지 못한 나의 깊은 마음속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렇게 찾아내야만 보듬어주고 위로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의 위로도 아닌 나 스스로의 위로 말입니다.

죽고 싶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걱정스러운 말씀에 다소 장황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짧은 게시글 답변 형태의 한계상 직접적인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드리지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부디 질문자님의 미래에 새로운 희망이 깃들 수 있기를 응원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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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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