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부산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 윤경일] 

 

나이가 육십이 넘으면 직장에서 은퇴할 때이고, 경제적으로 수입이 줄어들고 노화가 급격히 진행될 시점이다. 자식들은 제각기 원하는 곳을 향해 떠나가고 부부만 남아 집안은 늘 조용하다. 또 대인관계도 예전만 못해 새로운 만남은 별로 없고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어디가 아프면 혹시 암이 아닌가 하고 덜컥 겁이 난다. 모든 게 위축되면서 이 시기는 우울증 환자가 많아진다. 

 

부부관계가 정반대였던 우울증 환자 두 사람을 소개한다.

먼저, 남편 때문에 우울증이 생긴 경우이다. 정년 퇴임한 남편이 매일 집에 있게 되자 아내 P씨의 생활에 변화가 찾아왔다. 아내가 식사를 준비하면 남편은 맛이 없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P씨는 남편이 외출했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날이 더 좋았다. 또 직장에서 부하를 부리던 습관으로 남편은 아내에게도 명령하듯 대했다. 아내는 평소 잘하던 일도 주눅이 들어 실수했고 남편은 어김없이 핀잔을 주었다. 

P씨는 남편 대하는 것이 조마조마했다. 남편 눈치만 살피다가 자신이 무능한 존재처럼 여겨졌고 조금만 잘못해도 자책하면서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비하했다. 하루는 부부동반 모임이 있었다. 화장을 하며 예쁜 옷을 골라 입는데 남편은 아내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버럭 화를 내며 혼자 모임에 가버렸다. 이런 일들이 쌓이자 P씨에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P씨 부부가 함께 진료실에 들어왔다. 환자와 먼저 면담을 하는데 남편이 수시로 끼어들어 대변인처럼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사실과 다르게 말하자 ‘그게 아니라...’라며 P씨가 부연 설명하다가 자기 방식으로 주장하는 남편의 말에 그만 말문을 닫아버렸다. 부부관계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몇 차례 진료가 반복되면서 이런 패턴이 더 심해져 환자인 아내와 먼저 면담을 한 후 따로 남편과 면담을 했다. 남편은 아내의 우울 증상에 자신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은퇴 후 집에서 아내의 일을 도우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했다. 

어느 날 아내가 혼자 내원했다.

“남편과 늘 같이 오셨는데 혼자 오셨네요.”
“남편에게 문제가 생겨서 앞으로 혼자 오게 될 것 같아요.”

남편이 두통을 호소하여 검사해보니 뇌종양 진단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P씨 표정은 어둡지가 않았다. 남편은 뇌종양 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이 남아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단다. 이후부터 P씨의 우울증 상태가 좋아졌다. 

 

정신분석학자 에릭슨은 인격발달의 각 단계마다 극복해야 할 사회적 갈등과 과제가 있으며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되면 무난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P씨는 가정주부로서 생산성을 보여줄 수 있는 자질이 있었으나 남편의 은퇴라는 가정환경에 변화가 생기면서 정체성을 잃고 우울증에 빠졌다.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됨됨이와 독특함에 대한 자각적 의식으로서, 사회와 집단 속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안정적으로 잘 발휘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신적 고통을 계속 받게 되면 정체성에 혼란이 생기면서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진료 과정에서 현상황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자신을 성찰할 수 있다면 무가치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지지해 주었다. 반복되는 남편의 질타에 우울증에 빠졌지만, 남편의 뇌종양으로 인해 반전이 일어났다. 상실감 대신에 긍정적 역할이 주어진 탓이었다.

거동이 부자유스러운 남편을 간병해야 했는데, 비 온 뒤의 맑은 하늘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우울증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하루는 P씨가 말했다.

“남편이 저에게 그동안 너무 잘못했다며 미안하다고 했어요.”

남편의 고백은 그녀에게 어떤 항우울제보다 기분 좋은 치료제였으리라. 
 

사진_픽셀


다음은 독립심 상실이 우울증을 악화시킨 사례이다. 육십 대 초반의 L씨는 딸을 결혼시키고 나서 더욱 할 일이 없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불안, 초조, 우울감이 밀려왔다. 사회생활에 바빴던 남편은 아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때부터 아내와 매사를 함께하며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L씨의 증상은 특별한 치료하지 않았는데 좋아졌다.

주말이면 부부가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모든 일정은 남편이 짰다. 여행 옷을 살 때도 남편의 제안으로 같은 색상과 같은 디자인으로 골랐다. 그렇게 행복하던 부부에게 사건이 생겼다. 남편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L씨는 우울증이 급격히 나빠졌다.

항우울제를 충분히 처방해 주었는데도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달팽이 껍데기 속으로 숨은 은둔자처럼 칩거했다. 생명력이 고갈된 모습이었다.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다 보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인터넷 뱅킹을 할 줄 몰라 모든 은행거래와 기타 송금을 남편에게 의존해야만 하지 않았던가.

진료실에서 몇 번이나 “제 인생은 이제 의미가 없어요. 남편이 없는 세상은 살아갈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우울증이 오면 인생이 덧없고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살아온 인생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남편이 아닙니다. 사실은 당신의 인생을 잃어버렸습니다.”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이 말이 L씨에게 독립심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남편께서 이곳에 있었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
“이토록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진정 바라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말하고 싶었을 거예요.” 

그러자 L씨는 음색이 달라지며 말했다.

“그동안 제가 몰랐어요. 남편을 잃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 여겼어요. 하지만 언제까지 고통을 끌어안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채 우울하게 사는 것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이제 깨닫게 되었어요.”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남편을 기억해야겠다면서 사랑했던 기억들 위주로 간직하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L씨는 혼자 여행을 다녀왔단다. 남편과 여행할 때 입었던 커플 잠바를 꺼내 입고서! 이제 그녀의 우울증 치료는 재발방지를 위한 관리만 받으면 될 단계가 되었다. 

인생은 홀로서기다. 인생의 단계에서 주어진 갈등을 잘 극복하게 되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사람은 기쁨을 통해서도 성숙하지만 때로는 슬픔을 통해서 더 큰 성장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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