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환의 <시(詩)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3)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인간은 심각한 공포, 고통, 분노, 좌절 등을 경험하게 되면 이성적으로 판단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순간적 감정과 정서에 굴복해 현실에 무관심하거나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자꾸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현실 회피 혹은 현실도피라고 합니다. 당장은 편할 수 있겠지만 이는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괴롭고 힘들어도 현실 속으로 들어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문제가 보입니다.

현대인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 회피적 성향을 보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경증 증상 중 우울신경증의 일종입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충분히 좋아질 수 있습니다.

심리 치료에 들어가면 이런 분들은 자기 수용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자신과 자신이 처한 환경, 자기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는 것이죠. 자기를 수용할 수 있어야만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란 말 들어 보셨나요? 자신이 뭔가로부터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감정적 상처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나 행위를 가리키는 정신의학 용어입니다. 1894년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논문 「방어의 신경정신학」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방어기제에는 부정, 억압, 합리화, 투사, 승화 등의 방법이 있습니다. 대부분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기만하거나 변형시키는 겁니다. 이는 인간의 본능으로 필수 불가결한 것이기도 합니다. 방어기제 중에는 때에 따라 상황에 적응하는 것과 적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구분되기도 하고, 성숙한 것과 미성숙한 것으로 나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근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관계의 악순환만 계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신치료의 목적은 방어기제를 없애는 게 아니라, 좀 더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형태로 또는 좀 더 성숙한 형태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사진_픽셀


이성복 시인의 ‘그날’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1980년에 출간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수록된 시죠. 그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인들의 시인인 그가 40년 전에 발표한 시입니다. 1980년은 암울한 해였습니다.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리고 서울의 봄이 찾아오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광주에서 피비린내 나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요. 그 시기에 쓰인 시라 우울합니다. 장밋빛일 수가 없겠죠. 온통 잿빛입니다.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가족이지만 가족답지 않은 가족이 등장합니다. 아버지, 여동생, 어머니, 나, 네 사람은 제각기 자기 볼일을 봅니다. 뭔가 허전하고 텅 빈 듯 보이지만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습니다. 전방이 무사했다는 건 전쟁이 없었다는 뜻도 되겠고,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쿠데타가 빈번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잘 돌아갑니다.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요? 아무 일 없을까요?

그다음 연부터 전개되는 장면은 가히 아수라장입니다. 엉망진창입니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없는 게 없는 세상이 아니라 허무와 결여로 꽉 차 있습니다. 미래도 희망도 없습니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질긴 목숨 이어가며 내지르는 악다구니로 소란합니다. 세상은 신음으로 가득한데, 아무도 듣지 못합니다. 듣지 못하는 건지 안 들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은 참 이상한 세상입니다.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병들었어도 병든 줄 모르고, 신음을 내뱉어도 아무도 듣지 않고, 내 신음이 고통의 토설인지도 모르는 세상입니다.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우리 가족은, 나는 ‘그날’과 다를까요?

 

세상은 늘 무사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습니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40년 후도 그럴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면 곤란합니다. 나 자신에게, 내 가족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픈지 돌아봐야 합니다. 신음하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수용입니다. 현실 긍정입니다. 자신을 속이는 방어기제로부터 탈출하는 길입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일은 이로부터 시작됩니다. 삶의 문제 또한 여기서부터 풀려나가는 것이고요. 이럴 때 나의 ‘그날’은 잿빛이 아닌 장밋빛 ‘그날’이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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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의도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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