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박사 이광민의 (5)

[정신의학신문 : 마인드랩 공간 정신과, 이광민 전문의, 의학박사] 

 

‘결체조직성 작은 원형세포암’이라는 암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Desmoplastic Small Round Cell Tumor, 약칭 DSRCT’라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암입니다. 암 종괴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를 알기 어려워 진단도 쉽지 않고 치료도 어려운 암이죠.

2017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은 이 병을 앓고 있는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윤혁 씨는 스물셋이라는 나이에 이름도 생소한 이 병을 진단받고 기약 없는 암 치료를 받게 됩니다. 발견 당시 이미 말기여서 최대 3개월의 삶만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어릴 적부터 태권도를 배웠고, 유도를 비롯해 각종 운동을 섭렵한 그는 아마추어 보디빌더로 체육 교사를 꿈꾸던 건장한 체구의 젊은이였습니다. 

“아,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시련이…….”

믿기 힘들었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후 그는 피눈물 나는 투병을 이어갑니다. 3년 동안 10시간 넘게 진행되는 개복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고, 항암 치료를 26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머리카락이 빠졌고, 구역질 때문에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삼킬 수 없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가족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살아야 한다는 본인의 강인한 의지였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난 속에서도 그는 부모님 앞에서 한 번도 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이 웃었습니다. 그래야만 사랑하는 엄마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을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 직접 출연한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꿈을 그렸다고 했습니다.

 

항암 치료의 괴로움은 처절했습니다. 그런데도 회복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암은 기약 없이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항암 치료는 그의 삶을 더욱 병들게 했습니다. 그는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에 치료를 중단합니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사이클 대회인 ‘뚜르 드 프랑스’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납니다.

프로 선수마저 달리는 도중 사망한 일이 있을 만큼 힘들기로 유명한 이 대회는 자전거로 무려 3500킬로미터를 달려야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8번을 왕복해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는 49일에 걸쳐 완주하기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 다음 하나하나 실행에 옮깁니다. 영화 속에는 알프스산맥과 프랑스 시골길 등 그림 같은 풍경들이 등장하지만, 암 환자 이윤혁 씨의 질주는 눈물겨운 고행이었습니다. 항암 치료를 중단한 그는 하루 주행이 끝나면 기진맥진한 상태로 수액과 약을 맞으면서 버팁니다. 

‘希望(희망)’
‘for cancer patients(암 환자들을 위하여)’
‘암을 가지고 있는 나도 행복한데, 암을 가지고 있는 않는 사람들도 행복하길 바랍니다.’

암 환자로 이 대회의 완주를 꿈꾸는 한 청년의 꿈을 자전거에 적고, 이윤혁 씨는 마침내 이 대회를 완주해 냅니다.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향해 달리는 그의 모습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희망적인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너머에 있는 암 환자의 힘겨운 고통은 보는 내내 납덩어리처럼 마음을 짓누릅니다. 특히 완주까지의 과정 중에 동반된 여러 고난과 갈등, 그리고 완주 이후 암이 더 악화하면서 임종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우리가 다른 영화에서 기대하는 해피엔딩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윤혁 씨의 삶과 도전을 통해 불가항력의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 中

 

눈부신 의료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암이라는 질병은 죽음이라는 공포를 동반합니다. 설령 지금 당장 죽음이 눈앞에 있지 않더라도 암은 언제가 찾아올 죽음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듭니다. 암 치료가 순조롭게 끝나 검사에서는 암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한번 암을 경험한 사람은 순간순간 암 재발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 암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암은 여전히 우리에게 두려운 존재입니다.

이윤혁 씨가 자전거 대회에 참가했을 때는 암이 일차적으로 완화된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의료진도 항암 치료를 중단하게 되면 암이 악화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항암 치료가 완치가 목표가 아닌 소모의 과정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절망만 남은 상황에서 희망을 찾으려 애썼고 ‘뚜르 드 프랑스’ 완주라는 꿈을 이루어냈습니다. 

 

암을 관리하는 과정 중에는 때로 절망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물론 그 절망의 근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불안과 걱정에 낙심하거나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절망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인지를 검토하는 건 꼭 필요합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낙심과 우울감에 먼저 빠져들면 안 됩니다. 그전까지는 설령 불확실한 공포가 나를 지배하려 하더라도 의식적으로 밀어내면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절망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 상황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순간 들이닥칩니다. 

일반적으로 절망이라는 단어 다음에는 좌절이 따라옵니다만, 암에서는 절망 다음에 의외로 희망, 가치, 의지가 따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윤혁 씨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제인 톰린슨도 유방암 말기의 재발 상황에서 철인3종경기와 자전거 미대륙 횡단을 완주하는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그녀의 삶은 6년이나 이어졌으며, 마침내 미대륙 횡단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후 1년이나 더 삶을 영위한 뒤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강한 희망과 의지가 삶의 시계를 한참 동안 연장한 겁니다.

 

물론 암 투병 상황에서 자전거 대회나 대륙횡단과 같은 극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만이 의미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이런 사례는 아주 특별한 경우죠. 암 경험자가 암 재발 혹은 다른 절망적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속에서 삶의 희망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과정은 다양합니다. 때로는 소중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서, 내 사회적 역할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일상의 즐거움을 지켜가는 상황에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이어가는 노력 속에서 우리는 절망 가운데 희망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단지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깊은 의미를 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죽음이라는 상황과 마주해야만 합니다. 사람마다 시점은 다를지라도 그 결과는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같은 절망과 좌절의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 스스로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지는 그 시점이 아니라 내 삶의 의지가 결정합니다. 삶의 고결한 의지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암 경험자들께 응원과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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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마인드랩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경북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박사,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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