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11>

[정신의학신문 :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노고립 대리는 쾌활한 성격이다. 회사에서도 대인관계가 워낙 좋다 보니 인기가 많다. 퇴근 후는 물론 주말이나 휴가 때도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고, 이 모임 저 모임에 참석하느라 쉴 틈이 없다. 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술도 잘 마시는 터라 그가 빠진 모임은 흥이 나질 않는다.

그런 노고립 대리가 요즘 들어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종일 집에서 일해야 하니 누굴 만난다거나 모여서 회식을 한다거나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 예년 같으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바쁠 텐데 최근에는 한가하기 이를 데 없다. 동창들에게서도 전화 한 통 오지 않는다.

‘아, 정말 혼자 있는 시간이 답답하고 불안하다. 이게 외로운 걸까, 두려운 걸까?’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그로서는 아무런 약속 없이 일주일 이주일 흘려보내는 시간이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혼자 푸르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릴 때도 있다.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술을 마시다 보니 이제 매일 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 낮에는 그나마 일에 몰두하니까 괜찮은데 날이 어두워지면 마음 둘 데가 없어진다. 

‘언제쯤이나 출근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더는 버티기 어려워진 노고립 대리는 자신의 마음에 단단히 병이 들었다는 걸 직감하고 집 근처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 전문의와 상담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진_픽셀

 

상담 결과 노고립 대리는 의존성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걸 견디지 못했다. 아빠나 엄마 중 한 사람이라도 자기 시야에 보여야 안심을 했다. 조금 자라 학교에 가게 되면서부터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생겼지만,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친구들에게 의존하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방학이 곤혹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직장 생활을 하게 된 후에는 직장 동료들이 자신의 의존적 성향을 채워주는 대상들이었다. 선배, 동료, 후배들과 한데 어울리는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 그들이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즐거워하게 만들어야 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고 애를 썼다.

이렇게 의존성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기 어려운 까닭에 현재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하기가 힘든 것이다.

 

노고립 대리는 외로운 걸까 아니면 고독한 걸까?

외로움(loneliness)은 타인에게서 고립(isolation)되었을 때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타인과 연결되어 있지 못하고 세상에 나 홀로 떨어져 있다고 인식하는 정서다. 외로움은 심지어 타인과 함께 있을 때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 타인에게서 감정적으로 고립되었다고 생각할 때, 타인과 감정이 공유되지 못한 채 혼자서만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역시 외로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반면 고독(solitude)은 혼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긍정적인 감정이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상태다. 타인이 아닌 자기에게 집중함으로써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과정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 고독을 느끼기보다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본인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자기 자신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파악하고, 한 번도 스스로 내면을 깊게 바라본 경험이 없다 보니 타인을 깊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 또한 어려운 상태다.

 

인생은 누구나 홀로 왔다가 홀로 가게 마련이다. 단체로 왁자지껄하게 왔다가 단체로 분주히 짐을 꾸려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족도 친구도 회사 동료도 언제까지 내 곁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참 소중하지만, 그만큼 나 혼자 있는 시간도 소중하다. 내 옆에 아무도 없다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게 아니라 나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며 충만한 고독을 느낄 줄 아는 게 행복한 인생이다. 깊은 고독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길어 올리는 것이 지혜다.

 

외로움에서 벗어나 고독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노고립 대리 같은 경우 일기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날 경험했던 기억에 남는 일화 혹은 지금 막 떠오르는 생각을 부담 없이 써보는 것이다. 그때 내 기분이나 감정이 어땠는지 적어보고, 왜 그런 느낌이나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 찾아보도록 한다. 이유를 찾지 못해도 괜찮다. 지금 오로지 내 마음에만 깊숙이 집중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큰 변화는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게 어려운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나의 일대기를 정리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거창하지 않게, 소박한 자서전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살아온 길을 찬찬히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면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왜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된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처음 찾아온 사람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과 학창 생활을 떠올려보도록 권하고, 맨 먼저 이를 파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문을 닫고 실내가 어두워진 뒤 나는 혼자라고 절대 중얼대지 말라.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의 특별한 재능과 신이 네 안에 있다. 그들이 너를 알기 위해 무슨 불빛이 필요한가?”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한 말이다. 그는 노예 출신이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후기 스토아학파의 대가가 되었다. 그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더라면 노예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 안에 있는 특별한 것들을 발견했다. 그 결과 그는 한 시대를 빛낸 현자가 될 수 있었다. 그가 자신 안에 있는 특별한 것들을 발견한 시간, 그것이 고독의 시간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타인과의 관계가 끝나버린 단절의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과의 성숙한 관계를 위해 더 많은 걸 준비할 수 있는 연결의 시간이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는 관계에 관한 고민을 하기 어렵지만, 혼자 떨어져 있을 때는 비로소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가능해진다.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공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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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민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나를 지키는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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