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심리학과 만나다> (3)

비에 관한 추억 하나쯤, 없는 사람 드물 것이다. 같은 비라도 계절에 따라 뉘앙스가 다르다. 봄비는 생동감이 넘친다. 슬픈 기운이 덜하다. 여름철 장대비는 거세고 무섭다. 왕성한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 가을비는 을씨년스럽다. 스산하고 슬프다. 우산을 쓰고 가을 빗속을 거니는 연인들의 뒷모습에서는 낭만도 엿보이지만 쓸쓸함도 배어 나온다. 겨울비는 외롭다. 아무리 두꺼운 외투를 걸쳤어도 겨울비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은 춥고 고독해 보인다. 추억의 빛깔이 잿빛이든 장밋빛이든, 비가 내리는 날이면 저마다의 추억이 절로 소환된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건반 위의 시인 쇼팽은 ‘빗방울 전주곡’이라는 명곡을 남겼다. 비 오는 날이면 조건반사적으로 귓가에 재생되는 음악이다. 피아노를 위해 태어난 남자 쇼팽은 어떤 연유로 이 곡을 쓰게 되었을까? 곡에 등장하는 빗방울은 어느 계절에 떨어지는 빗방울일까?

 

사진_픽셀

 

시작은 경쾌하고 부드럽다. 막 사랑이 싹트는 봄날 같다. 온 천지에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노란 병아리들이 그 위를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닌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비가 내린다. 후드득후드득, 봄비다. 사랑은 그렇게 느닷없이 시작된다. 가슴이 뛴다. 쿵, 쿵, 쿵……. 

봄날은 짧다. 약간 어둡기도 하고 장중하기도 한 음악이 이어진다. 천둥까지 동반한 호우다. 대낮인데도 저녁처럼 어스름하다. 인생에 적어도 한 번쯤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한 격정적 사랑의 시기가 오게 마련이다. 마음이 쓰리고 아프지만 이래야만 사랑도 여문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새벽이 밝았다. 햇살이 비췬다. 날은 맑은데 비가 떨어진다. 가을비다. 총천연색 낙엽 위로 내려앉는 빗방울은 처연하기보다는 감미롭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만이 살아갈 힘을 준다. 다시 사랑해야지. 열매가 익어가듯 사랑도 익어간다. 

또 봄날이다. 이슬비가 실루엣처럼 내린다. 가뿐하고 상큼하다. 차디찬 겨울로 곤두박질치지 않고 봄의 기운을 회복한 자신이 대견하다. 사랑의 슬픔은 사랑의 기쁨으로만 대체될 뿐. 봄날의 풋풋한 사랑을 꿈꾼다. 빗방울의 긴 여운처럼 심장이 뛴다. 콩, 콩, 콩……. 

 

‘전주곡(prelude)’이란 본격적으로 음악이 전개되기 전 도입부 역할을 하는 짧은 곡이다. 연주자가 연주에 앞서 악기의 음정은 잘 맞는지 소리는 잘 나는지 점검해보고 손가락도 풀기 위해 악기 소리를 내보는 데서 유래했다. 대개 독주 악기를 위한 작품이 많다. 그런데도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은 완전히 독립된 하나의 작품이다. 연주 시간이 5분 남짓하지만, 사랑의 아련한 기쁨과 쓰라린 슬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곡이다. 왼손가락이 계속해서 같은 패턴으로 건반을 두드리기 때문에 낙숫물 소리를 연상케 한다고 해 이런 별칭이 붙게 되었다. 뚝, 뚝, 뚝, 처마 밑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똑, 똑, 똑, 누군가 문밖에 서서 비를 맞으며 집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노크하는 듯이 들리기도 한다. 

 

이 곡을 쓰던 1839년, 쇼팽은 스페인의 유명 휴양지인 마요르카에 머물고 있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여섯 살 연상인 조르주 상드와 그녀의 두 자녀와 함께였다. 성공한 소설가이자 화제의 인물이었던 상드는 쇼팽의 연인이었다. 그 무렵 쇼팽은 심한 폐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파리의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보내고자 이 섬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마요르카 날씨는 최악이었다. 숙소도 마땅치 않아 간신히 발데모사 수도원 근처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지독한 추위가 몰려오는 바람에 쇼팽의 건강이 더 나빠지고 말았다. 쇼팽을 진단한 의사는 그가 죽을 거라고 말했다. 각혈하는 쇼팽을 보며 주민들은 감염될까 봐 두려워했다. 설상가상으로 쇼팽과 상드가 결혼하지 않은 걸 알게 된 주민들은 그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휴양을 온 게 아니라 유배를 온 듯했다.

쇼팽에게 필요한 건 건강과 사랑 그리고 피아노였다. 파리에서 마요르카로 향할 때 피아노를 가져가려 했으나 세관에 묶여 가져올 수 없었다. 어렵사리 피아노가 도착한 건 그들이 섬에 도착한 지 한 달 이상 지난 뒤였다. 자유분방한 상드와 고지식한 쇼팽은 의견 충돌이 잦았다. 건강을 잃고 사랑에 지친 우울한 쇼팽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피아노뿐이었다. 그는 작곡에 몰두했다. 쇼팽이 작곡한 24개 전주곡 대부분은 마요르카에 머물 때 만들어졌다.

비 내리는 어느 날, 쇼팽은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상드가 두 아이를 데리고 외출한 것이다. 쇼팽은 멍하니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허물어져 가는 육신, 지쳐버린 마음, 방황하는 영혼, 게다가 처량하게 쏟아져 내리는 겨울비. 그는 무의식적으로 피아노 위로 손을 가져갔다. 똑, 똑, 똑, 빗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있는 방에도, 발데모사 수도원에도, 마요르카섬에도 빗방울 소리가 가득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지 피아노 건반 위에서 떨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쇼팽의 전주곡 15번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시인 기형도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노래했지만, 쇼팽은 건강도 사랑도 다 잃은 뒤에야 음악을 찾았다.

 

사진_픽셀

 

사랑은 어떤 단계를 거쳐 진행되는 걸까?

심리학, 철학, 인류학, 예술사를 전공한 뒤 독일 쾰른에서 심리 진단 및 상담소를 운영 중인 심리학자 페터 라우스터는 자신의 저서 『사랑에 대하여』에서 다섯 단계로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는 주목이다. 사랑은 우선 대상을 주목하게 된다. 지극히 다양한 이유에서, 우리는 마음에 드는 한 인간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우선 감각의 자극을 통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감각은 세계가 우리에게로 뚫고 들어오는 문이다. 모든 사랑의 원천은 감성이다. 

두 번째 단계는 환상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현실 속에서 환상을 그릴 수 있다. 그러면 정신이 활발해지고 바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환상은 한 번 자극받으면 그다음에는 자기 나름의 길을 간다. 환상은 현실로부터 등을 돌린다. 결과는 환상의 나라 속 사랑이다.

세 번째 단계는 자기 인식과 자기실현이다. 상대방의 사랑은 언제나 나에게 힘을 주고 내 존재의 의미를 보증해 준다. 상대방의 무관심이나 경멸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나에게 고독과 고립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랑 속에서는 고립이 극복된다. 그리고 안정감을 느낀다. 

네 번째 단계는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위기다. 둘이 함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 있을 때의 자기 인식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위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그물로 나비 잡듯 사랑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사로잡히지도 않고 소유되지도 않는다.

다섯 번째 단계는 해소 혹은 심화다. 사랑은 강요로 얻어지는 게 아니며, 우리 속에 가두어놓을 수도 없다. 사랑은 민감한 영혼의 반응이다. 사랑은 오고 또 간다. 쌓이고 또 헐린다. 불붙고 또 꺼진다. 그 어떤 강압도 없는 영혼의 상태에서 사랑의 심화는 이루어진다. 

오랜 세월 사랑이라는 현상을 밝히는 일에 매진해 온 그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마음이 완전히 열려있을 때, 모든 감각이 깨어있을 때, 영혼이 느낄 태세가 되어있을 때, 내가 나날이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고 상처 받을 수 있을 때, 오직 그럴 때만 사랑은 가능하다.” 

 

피아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영예를 한 몸에 받았던 쇼팽과 그를 열렬히 흠모했던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여성 작가이자 두 아이의 엄마였던 이혼녀 조르주 상드의 사랑은 어땠을까? 모성애적 연애 사건으로 유명했던 두 사람의 사랑은 위대한 사랑이었을까? 영원한 사랑이었을까? 운명적 사랑이었을까? 두 사람의 사랑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을까? 

맞지 않는 옷 같았던 두 사람 관계는 길게 가지 않았다. 상드가 쇼팽을 떠난 것이다. 상드는 훗날 쇼팽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식어 버린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페터 라우스터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인식에 날카로운 일침을 가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위한 운명적인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런 만남을 추구하고 있다. 사랑은 어느 한순간 외부로부터 운명적으로 오는, 사랑의 실현을 위한 의지 없이 그대로 내맡겨지는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다. 사랑은 늘 마음의 준비 자세와 결부되어 있다. 나 자신의 마음과 정신이 열려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나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준비 자세가 없으면 그 어떤 만남에서도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한 만남은 결국 냉담한 관계로 끝나고 만다. 단 한 번의 위대한 사랑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에서 사랑을 빼면 무엇이 남겠는가? 끝이 어디든 한번 시위를 떠난 사랑의 화살은 꽂힐 때까지 날아가는 법이다. ‘빗방울 전주곡’을 들으며 미소가 머금어진다면 사랑에 빠진 것이고, 눈물이 난다면 실연의 아픔을 겪는 중이리라. 그렇더라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생채기가 아물면 다시 사랑할 시간이 올 것이다. 전쟁 중에도 사랑은 꽃피는 것처럼. 비 내리는 캄캄함 밤 홀로 남겨진 쇼팽이 고독의 심연 속에서 위대한 음악을 만든 것처럼. 

언젠가 기회가 되면 조성진이 연주하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들으며 마요르카 거리를 걷고 싶다. 때마침 비라도 내린다면 해변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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