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부산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윤경일] 

 

스스로는 내성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타인들은 외향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하다 보니 사람들 눈에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또 동일인이라도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이 일관되지 않는 것은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장르 중에는 영화가 있다. 역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를 보면 정신의학적 문제를 연기한 배우가 많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본다. 예상 밖의 기묘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 배역을 중량감 있는 배우가 멋지게 소화해 낸 것이다.

여기서 짚어보아야 할 점은 허구를 정신과적 사실인 것처럼 영화로 만들고, 이를 본 관객은 은연중에 실제인 양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부정적 장면은 머릿속에 박히면 옹이처럼 잘 뽑히지 않는다. 정신의학을 바라보는 이러한 색안경에 대해서 꽃의 속성에 착안하여 역설적으로 조명해 보려고 한다.

 

사진_픽사베이

 

시골 담벼락에 핀 하얀 박꽃을 생각해 보자. 가을이 되면 꽃은 지고 박이 주렁주렁 열리면서 농촌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고전 흥부전과 장화홍련전에도 박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데, 박의 이미지는 화려함과 거리가 멀다. 누가 억지소리를 해도 부끄러워 말 한마디 못할 것 같은 수줍은 이미지다. 그 모습이 전통적인 여인의 삶과 닮았다. 이 박을 타서 바가지를 만드는데 여인들의 공간인 부엌에서 흔하게 보이는 물건이다. 곡식을 푸거나 물을 뜰 때 바가지가 사용되지만, 때론 여인들이 속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바가지를 긁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기 한번 펴 보지 못하면서 살았고, 시어머니의 부당한 구박에도 언제나 복종해야 했다. 그러니 부엌에 들어가서 애꿎은 바가지라도 집어던져 화를 풀어냈다. 바가지 깨지는 소리에 잠시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었으리라. 하지만 깨진 바가지가 아까워서 실로 다시 꿰매어 쓰는 여인네들이었다.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가치를 인정받아야 했던 여인들은 자신의 소질과 개성을 포기한 채 인생을 살았으니 여인들과 동고동락했던 박에는 우울증의 정서가 배어 있는 듯하다. 

 

중년의 여성들은 소녀 시절에 봉선화 꽃잎을 따서 손톱에 물들이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초여름에 붉은색과 분홍색으로 피는 봉선화는 억압된 분노가 담겨 있는 꽃이다. 씨앗이 영글어 갈 무렵에 사람의 손이 다가가면 봉선화는 완강하게 거부하듯 스스로 터져 씨앗을 받기가 쉽지 않다.

그리스 신화에는 봉선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올림푸스 궁전에서 연회가 벌어진 날 황금 사과 한 개가 없어졌다. 심술궂은 어느 신이 장난을 친 것이었다. 엉뚱하게도 시중을 들던 한 여인이 의심을 받아 올림푸스 동산에서 쫓겨난다. 여인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자 그만 속이 곪아 터져서 죽는다. 여인이 죽은 자리에는 한 송이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봉선화다. 

봉선화는 누구라도 자신을 건드리면 씨주머니를 터뜨려 결백과 분한 마음을 하소연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절 민족의 한을 달래주던 노래 ‘울 밑에 선 봉선화야’ 역시 현실의 분함을 삭이기 위한 노래였다. 억울함과 한이 서려 있는 꽃 봉선화. 이 꽃을 보고 있으면 ‘화병’이 연상된다. 응어리진 감정이 누적되어 생기는 화병은 속에서 열기가 치밀고 등에는 식은땀이 나고 얼굴이 활활 달아오르는 등 신체 증상이 동반된다.

 

봄에는 계절의 전령을 자처하는 꽃들이 시샘하듯 꽃망울을 터뜨린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등. 이들은 생명의 봄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피어난다. 긴 겨울잠에 갇혀 무척이나 갑갑했던 탓일까. 

한 번은 환자가 노란 개나리를 꺾어 온몸에 장식을 한 채로 내원하여 “의사 선생님, 제 분신이니까 자, 받으세요.” 큰 소리로 말하며 옷에 꽂혀 있던 개나리들을 진료실 책상 위에다 던졌다. 그 환자의 진단은 조증이었다. 개나리와 조증은 서로 닮은 속성이 있는 것 같다. 잎사귀가 나기도 전에 원색의 꽃망울을 급하게, 충동적으로 터뜨리면서 자태를 뽐내지 않는가. 실제로 봄꽃이 필 무렵이면 흔히 조증이 재발한다. 

 

꽃은 대부분 낮에 피었다가 밤이 되면 오므라든다. 하지만 어떤 꽃은 반대의 속성을 지녔다. 달맞이꽃이 그렇다. 달이 뜰 때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어떤 이는 밤마다 노랗게 핀다고 하여 달맞이꽃을 화류계의 여성에 비유하기도 한다.

어두움을 좋아하는 달맞이꽃은 햇빛이 강렬한 낮에는 연약함과 불안에 떨다가 달이 뜨면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는 사회적 위축이 있는 조현병 환자가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사람들의 활동이 뜸한 야간이 되면 살살 움직이는 모습과 닮았다. 이런 속성을 두고 달맞이꽃을 조현병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갈대와 수선화에는 사람의 인격적 속성이 담겨 있는 듯하다. 바람결에 사르르 드러눕는 갈대의 모습은 늦가을 서정으로 최고이지만, 갈대처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옆에서 한마디 하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또 누가 반대로 말하면 그 말에 솔깃해져서 기울어지는 사람. 심지어 혼사마저 스스로 결정짓지 못하고 주변에서 정해 주어야 할 정도로 줏대 없는 사람이 있는데 이를 두고 의존적 성격이라고 칭한다. 

 

수선화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일화로 유명하다. 에코는 정성을 다하여 나르시스에게 사랑을 보내지만, 나르시스는 에코의 사랑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에 화가 난 에코는 복수의 여신에게 부탁하여 나르시스를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사랑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수면 위에 비친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붙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나르시스는 그만 물속에 빠져 죽고 만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수선화다.

청초한 모습의 꽃이지만 태생을 알고 보니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뻐기는 꽃이다. 남들과 공감할 줄 모르고 자신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콧대 높은 꽃이라면 정신의학적으로 자기애적 성격에 들어간다.

 

여러 정신과적 상황을 꽃에 비유해 보았다. 과거에 비해서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문턱이 많이 낮아졌지만, 정신과 치료를 망설이는 이들이 있다. 자신의 문제가 아름다운 꽃의 속성과 닮았다고 여긴다면 치료에 대한 부담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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