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선생님, 이번에 미국출장 갔다 오면서 선생님 생각이 나서 하나 사왔어요.” 

진료실에 들어온 그녀가 예쁘게 포장된 조그마한 상자를 내게 내민다. 보통은 환자들의 선물을 거절하던 나였지만 그녀의 선물은 크게 기뻐하며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해내셨군요!” 

그녀가 수줍게 웃는다. 그녀는 나에게 수년째 공황장애 치료를 받던 환자였다. 

 

어느 날 차를 운전하고 가던 그녀는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원인모를 공포에 휩싸였다. 응급실로 실려가 온갖 검사를 받았지만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공황발작이었다. 그러나 악몽은 그날로 끝난 게 아니었다. 공황발작은 그녀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갈 때마다 찾아왔고, 그녀는 비행기를 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3년에 걸친 치료 후에 그녀는 더 이상 공황발작을 겪지 않게 되었다. 증상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약물치료를 하고, 수면을 조절하고, 자신의 괴로운 이야기를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얻어진 그녀와 나의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자신이 사는 동네를 벗어날 수 없었다. 움직이는 차 속에서 겪은 공포스러운 기억이 그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그녀는 번번이 출장과 승진의 기회를 놓치곤 하였다. 

 

진료실 내에서 얻은 마음의 평화를 일상생활로 확산시키는 것.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들이 그 상처를 넘어서기 위해 겪어야 하는 가장 어려운 단계이다. 어떤 이들이 일 년에 수십 번도 넘게 타는 비행기는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마음이 겪은 공포의 상징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지난번 진료시간에 갑자기 해외출장을 갔다 오기로 결심했다며 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나는 그녀가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먹을 수 있도록 작은 알약을 처방하며 말했다. 

“이건 그냥 약이 아니라 일종의 ‘스위치’ 같은 것입니다. 휴대용 의사라고 생각해도 괜찮아요. 그리고 잊지 마세요. 어떤 일이든 그것을 시작하기 직전이 가장 두렵다는 것을.” 

 

사진_픽사베이

 

오늘 그녀는 멋지게 해외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다. 비행기를 타는 동안 내가 처방한 비상약을 먹는 대신 손에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열어본 상자에는 초콜릿이 들어있었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비행을 극복하고 낯선 땅에 도착한 그녀가 느꼈을 환희와 자부심을 생각해본다.

비행기가 그녀에게 있어서 공포를 상징하였다면 비상약은 그녀에게 있어서 극복을 위한 노력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이루어낸 그 놀라운 성과를 어떤 형태로 남겨두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가 선물한 초콜릿은 그녀가 이루어낸 극복의 상징이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눈에 보이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마음을 형태로 만들어두는 것. 비행기도, 의사도, 감사의 선물도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형태인 것이다. 부디 우리가 서로에게 있어서 멋진 마음의 형태가 되어줄 수 있기를.

 

<본 칼럼은 좋은 생각 2020년 10월 호에 기고되었습니다.>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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