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입니다. 답답한 심정을 어디 털어놓지 못해 여기라도 적어봅니다. 

우선 저는 우울증 진단을 받은 지 일 년쯤 지났고 자해와 자살 시도로 보호병동에 입원한 적도 있습니다. 퇴원 후에는 큰 감정 기복 없이 잘 지내고 자해도 안 했는데 지난주부터 끝없이 무기력해지면서 축축 처지더니 급기야는 아침에 일어날 수 없어서 지각을 밥 먹듯 하고 학교에서도 하루 종일 엎어져 잠을 잤습니다. 너무 무기력한 것 같아서 친구와 일부러 아침에 약속도 잡아 봤지만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어서 약속을 깨 버리고 친구가 단단히 화가 났더군요. 

 

무기력해지니 일상생활이라는 것도 깨져 버렸습니다.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수능 공부도 안 하고 늘어져 버렸고 심지어는 이러고 있는 제 자신이 한심하지도 않아요. 그냥 '아, 무기력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이 생각밖에 하질 않네요. 그저 무언갈 하면 그만하고 싶어 죽겠고 빨리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휴대폰으로 자살에 대한 것을 검색하곤 하고 자해를 다시 시작할까 고민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검색할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쇼핑 같이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곤 하고 끝없이 자살하는 상상만 합니다. 

이전에 우울증이 심해지면 무기력해지고 잠이 많아질 수도 있다고 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증상과 너무 잘 맞는 것 같아서 두렵네요. 저는 도대체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못 할까요?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두렵기만 합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의학신문 정희주입니다.

이전에 이미 우울증 진단을 받았었고, 병원에 입원한 경험도 있으시네요. 힘들었던 순간을 잘 넘기면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던 와중에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감을 맞닥뜨리게 되었다는 것이 좌절스럽고, 안타깝게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작성해주신 글에서 그런 감정의 절절함이 느껴집니다. 

 

가장 먼저 글쓴이분이 느끼는 감정이 고통스러우시겠지만 그 나름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느끼는 무기력, 허무함, 자해를 하고 싶은 생각은 어떤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반응입니다. 목표와 현실 사이의 괴리인지, 인간관계의 어려움인지, 불확실한 미래 같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글쓴이분을 힘들게 하는 어떤 요인이 있었고,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써 스스로를 지키고 내면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쉬어가라는 내면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도대체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못 할까요'와 같은 질문을 가장한 자기 비하가 아니라 힘든 자신을 충분히 보듬고 위로해 주는 연민의 마음 같은 것들입니다.

또한 어떤 것들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는지를 좀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따져보아야 합니다. 고통의 원인과 그것이 나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 납득할 때 스스로를 더 잘 공감하게 되고 이는 현재의 무기력감과 우울감에서 회복하는 발판을 제공해줍니다. 

 

다음으로 지금 글쓴이분에게 가장 신경이 쓰이고 있는 무기력감 자체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적절한 정도의 무기력감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친 심신을 잠시 쉬게 만들어 에너지를 충전시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무기력감이 오래되고 증상이 심하면, 기분을 나아지게 만드는 즐거운 행동을 회피하게 되면서 무기력감이 더욱 심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무기력의 순환고리는 우울증의 중요한 증상이면서 우울증을 유발하고 유지시키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현재 글쓴이분은 우울증의 상태이며 무기력의 순환고리가 우울증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컨대 친구와 약속을 어김으로써 받게 되는 비난은 자기 비하를 심화시킬 수 있으며, 자해를 하게 된다면 스스로에 대한 더 큰 실망감을 유발할 것입니다.

무기력의 순환고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나를 즐겁게 만드는 행동을 찾아 시행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보다 기분이 나았을 때 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산책일 수도 있고, 초콜릿을 먹는 것일 수도 있고, 방 청소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가능한 쉽고 구체적인 행동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쌓이다 보면 무기력감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전에 한번 극복했던 경험이 있는 만큼 다시 이전의 평온한 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으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굳이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주변에도 자신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아보고, 정신과 주치의와 상담하여 전문적인 조언과 처치를 받아보시는 것도 중요하고, 또 필요합니다. 부디 저의 짧은 글이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셨기를 바랍니다. 

 

 

*  *  *
 

정신의학신문 마인드허브에서 마음건강검사를 받아보세요.
(20만원 상당의 검사와 결과지 제공)
▶ 자세히보기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살피려는 노력을 하기, 그리고 작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의식적으로’ 목표에 대해 보상하기. 중요한 내용을 많이 배워갑니다!"
    "근육을 키운다는 느낌으로 조금씩 실천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