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심리학과 만나다> (5)

오뚝한 코에 짙은 눈썹과 초롱초롱한 눈망울. 초상화 속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인생의 풍파를 별로 겪지 않았을 것 같은 전형적인 귀공자 스타일이다. 독일 초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서양 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슈만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처럼 화려하다.

하지만 그는 누구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았으며, 정신적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사람이었다.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의 위상과는 달리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품은 많지 않다.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그린 ‘어린이 정경’ 제7번 ‘트로이메라이’가 제일 유명한 곡일 것이다. ‘꿈’ 혹은 ‘공상’이라는 뜻을 가진 ‘트로이메라이’는 클라라에 대한 그의 사랑이 흘러넘치듯 감미롭고 서정적이다.

그러나 그의 삶 전체가 녹아 있으면서 영원한 연인 클라라에 대한 사랑이 애절하게 잘 표현된 곡은 슈만 최후의 피아노곡으로 알려진 ‘유령 변주곡’이다. 제목에 유령이라는 단어가 들어감으로써 으스스한 느낌이 들 수도 있고, 처음 들으면 건조하거나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여러 번 듣다 보면 비로소 슈만 음악의 정수를 음미할 수 있다.

 

애잔하고 구슬프다. 건반에서 울려 퍼지는 음색은 마냥 푸르르나 그 안에 담긴 정서는 어두운 회색빛이다. 흔들리지 않는 경쾌함은 눈물을 감추려는 몸부림 같고, 리듬감 넘치는 세련미는 침울함을 들키지 않으려는 과장처럼 느껴진다. 차분하지만 어떤 곡보다 격정적이다.

무엇엔가 간절히 호소하던 음악은 절규로 이어진다. 거듭된 두드림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뭔가 내보인 상대방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슈만은 정성을 다해 계속 문을 두드린다. 누구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저리도 애타게 부르짖는 것일까?

종반으로 가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절절한 심정을 더 진솔하게 내보이려는 것이다. 감정의 벽은 이미 허물어졌다. 그의 호소는 자기 자신 혹은 사랑하는 연인 또는 인생 전체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건반을 누른 뒤 그는 들었을까? 기나긴 절규에 대한 응답을.

 

사진_픽사베이

 

“1854년 2월 27일 오후가 시작될 무렵 차가운 비가 뒤셀도르프를 적셨다. 추운 날씨였지만, 사람들은 그날이 사육제가 열리는 날이라는 생각으로 기운을 냈다. 빌커 가 15번지 건물에서 실내화에 셔츠 차림의 남자가 나와 포장도로를 걸어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따금 그의 걸음이 불안정하게 비틀거렸다. 얼굴에는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고 눈길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아니 내면을 향해 있다고나 할까. 그는 울고 있었다.

…… 몇 걸음 걷고 난 뒤 그는 난간을 넘었다. 라인강은 군데군데 얼어 있었다. 남자의 몸은 이내 물살에 휩쓸렸지만, 그로부터 헤어나려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거룻배 위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이 서둘러 다가가 그를 물 밖으로 끌어냈지만, 그는 또다시 물로 뛰어들었다. 둑으로 그를 데려간 어부들은 그가 다시 뛰어들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어야 했다.

…… 하지만 후에 아내 클라라가 그의 일기를 보고 그날 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우울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가 그의 몸에 손을 대려 하자 그가 소리를 질렀다. “아, 클라라, 난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그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로부터 불과 며칠 전 작곡한 ‘유령 변주곡’ E플랫 장조를 다시 베껴 쓰기 시작했다. 마지막 곡에 이르자, 그는 방에서 뛰쳐나갔다.”

 

프랑스에서 작가, 평론가, 정신분석학자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셸 슈나이더가 쓴 『슈만, 내면의 풍경』이라는 책에 나오는 슈만의 라인강 투신 사건에 대한 묘사다.

그는 슈만의 음악을 ‘그 어디에도 이르지 않는, 줄곧 되돌아오는 듯한, 끝에서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의 음악이라고 표현했다. 죽도록 고통스럽지만 스스로 고통을 토로할 수 없는, 너무도 사랑하지만 자기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음악이라고나 할까. ‘유령 변주곡’이 바로 그런 곡이다. 당시 슈만의 정신질환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슈베르트나 멘델스존 혹은 천사가 불러주는 선율을 받아 적었다며 이 곡을 썼다. 그렇지만 이 곡은 친한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을 위해 한 해 전에 썼던 바이올린 협주곡 주제였다. 슈만은 이 작품을 완성한 뒤 본 근처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들어갔고,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수려한 외모, 아름다운 음악, 클라라와의 운명적 사랑, 이런 수식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슈만의 사생활은 문란했고, 육체는 질병에 신음했으며, 정신은 황폐했다. 젊은 시절 프리드리히 비크의 문하에서 피아노를 배우던 슈만은 오른손을 다쳐 피아니스트로 활동할 수 없게 된다. 매독에 걸려 수은을 사용한 결과 부작용이 생긴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 이즈음 시력 이상으로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했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한 그는 문학적 재능을 살려 평론과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다. 스승 비크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다. 피아노 신동 클라라였다. 슈만은 아홉 살 연하의 클라라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비크는 어린 딸과 결혼하겠다는 슈만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당연히 결혼은 결사반대였다. 이 여자 저 여자와 놀아나며 성병을 달고 살던 한량 슈만에게 장래가 촉망되는 외동딸을 시집보낼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비크가 슈만을 고소하자 슈만 역시 비크를 맞고소했다. 장인과 사위가 딸을 사이에 두고 법정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인 것이다. 법원은 결국 슈만의 손을 들어줬다. 클라라가 성년이 되면 아버지 허락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 두 사람은 자녀를 여덟이나 낳을 만큼 금실 좋은 부부였다.

 

결혼 이후 슈만은 평론가로 작곡가로 국내외를 다니며 왕성하게 활동하지만, 점점 정신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분이 좋고 에너지가 충만할 때는 많은 글과 곡을 썼으나 침울하거나 우울할 때는 글 한 편 음악 한 곡 쓰지 못할 정도로 감정 기복 또한 극심했다.

그를 끝까지 괴롭혔던 정신분열증은 요즘 말로 하면 조현병이다. 조현병은 사고, 감정, 지각, 행동 등 여러 측면에서 광범위한 이상 증상을 일으키는 정신질환이다.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에서 조현병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조현(調絃)’이란 현악기의 줄을 표준음에 맞게 고른다는 뜻이다. 조현병 환자의 모습이 현악기가 정상적으로 조율되지 못했을 때처럼 혼란스러운 상태를 보이는 것과 같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조현병 증상은 양성과 음성으로 나눌 수 있다. 양성증상은 망상, 환각, 파괴된 언어나 행동 등 겉으로 드러난 증상을 말한다. 망상은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거나 해코지하려 한다는 피해망상, 세상일이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 관계망상 등이 있으며, 환각 중에는 환청이 가장 흔하다. 슈만 역시 망상과 환청에 시달렸다. ‘유령 변주곡’을 작곡할 때는 그 정도가 최고조에 달했다. 반면 음성증상은 행동이나 감정표현이 줄어들거나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의욕이 저하되는 모습을 보인다. 심각한 것 같지 않아도 삶의 질을 급격히 떨어뜨린다.

정신적으로 예민한 예술가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조현병은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 등을 꾸준히 병행하며 노력하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슈만이 의학이 발달한 요즘 태어났더라면 평생 자신을 괴롭힌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아름답고 풍성한 음악을 더 많이 만들었을 것이고,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했으리라.

 

깊어가는 가을, ‘건반 위의 구도자’라는 별칭을 가진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다. 슈만과 함께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음반 발매와 더불어 한글날 서울 롯데콘서트홀 연주를 시작으로 수원, 광주, 통영 등 전국 공연에 나선 것이다. 프로그램은 슈만의 첫 작품 ‘아베크 변주곡’에서부터 마지막 작품 ‘유령 변주곡’까지다. 왜 하필 슈만일까? 온 인류가 고난과 역경에 처한 이때 그는 슈만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곡은 ‘유령 변주곡’이다. 이 곡을 쓸 무렵 슈만은 삶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의 나이 44세. 백발에 안경을 쓴 백건우는 올해 74세의 노인이다. 30년 차이. 그러나 슈만이 활동하던 시대의 평균 나이와 비교하면 지금의 백건우와 그때의 슈만은 엇비슷한 연령대라고 봐야 한다. 좀 더 극명한 차이는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 백건우는 더욱 엄숙하고 경건해졌다는 것이다. 드디어 슈만을 제대로 이해하고 연주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연주가 끝난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슈만에 대한 애도였을까 아니면 공감이었을까?

백건우와 슈만은 살아가는 방식이 정말 다른 사람들이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같다. 광기와 순수. 그래서 백건우는 노년에 이르러 슈만에 주목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슈만과 ‘유령 변주곡’에 대해 이런 소회를 밝혔다.

 

“이번 기회로 슈만을 재발견한 셈입니다. 젊었을 때 수없이 연주했어도 어쩐지 불편했다던 슈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슈만이 정신적으로 심각하기만 했다면 ‘유령 변주곡’을 쓸 수 없었을 겁니다. 한 음 한 음이 살아있고 모두 의미가 있거든요. 어떤 심정으로 자기가 직접 짐을 싸서 정신병원으로 들어갔는지, 사랑하는 클라라와 아이들에게 위험이 되지 않게 혼자 걸어 나온 그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슈만은 죽는 날까지 아이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사람, 그러면서 동시에 인생의 쓰라림을 음악으로 표현해낸 작곡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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