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와 함께 보는 넷플릭스

[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드라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조승우 연기력 논란

얼마 전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배우 조승우 씨에 대한 연기력 논란 게시물이 올라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바로 최근 넷플릭스에 시즌 2가 공개된 tvn의 인기 드라마, [비밀의 숲]을 본 어떤 네티즌의 게시물이다. 짧은 내용인즉,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의 감정 연기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비숲 조승우 연기가 좀 아쉽.... 감정이 전혀 없어 보이네요...."
 

사진_비밀의 숲 황시목 검사(조승우)

 

#로봇검사 황시목

비밀의 숲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주인공 '황시목 검사'는 뇌수술의 후유증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 인물이다. 그러니까 조승우의 연기에서 감정이 전혀 없어 보였다면, 그만큼 그의 연기력이 대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원래 그런 역할이니까.

황시목 검사는 그 수술의 후유증으로 감정을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기억력과 관찰력은 반대로 비상하게 좋아졌다. 그러니까 황시목은 감정은 없지만, 초인적인 기억력과 지능을 가진, 그야말로 컴퓨터 로봇과 같은 인물이다.

실제로 감정과 관련된 뇌의 영역을 제거하는 뇌 수술은 최근에도 종종 이루어지고 있다. 심각한 난치성 정신질환의 경우에는 대상회(cingulate gyrus)의 일부분이나 기저핵 사이의 섬유 일부(anterior capsule)를 제거하곤 한다. 이러한 뇌수술에서는 간혹 무감동증(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증상)이 후유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수술의 후유증 때문에 정확히 드라마 속 황시목 검사와 같은 상태가 되기는 어렵다. 인간의 감정이란 무척 다양하고, 굉장히 다양한 뇌의 부위가 복합적으로 관여하는 기능이다. 따라서 수술로 뇌의 어느 한 부분이 제거되었다고 모든 감정을 통째로 잃어버리긴 어렵다. 심지어 그러면서 검사직을 할 정도의 사회적 감각은 남아있고 비약적인 지능 향상까지 생겼으니, 여러모로 상당히 극적인 설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감정이라는 방해물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지만, 그 덕분에 드라마는 무척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일반적인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겪을 법한 감정적인 경험들에 불필요한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다. 주인공이 으레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장면이 나올 법한 순간에도 황시목 검사는 전혀 동요가 없다. 그저 상대방을 대략 2초간 묵묵히 쳐다보더니 다시 본론을 이어갈 뿐이다. 그러면서도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으로 치밀하게 서사를 엮어간다. 열정으로 불타는 정의감이 아닌, 차가운 판단력으로 날 선 정의로움을 빚어간다.

황시목은 감정에 방해받지 않는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황시목을 보며 스토리 진행에 유달리 명쾌함을 느꼈다면, 아마 평소 한 번쯤은 감정이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감정'의 존재를 불필요한 방해물로 여기곤 한다.

 

#감정의 논리

비밀의 숲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 역시 순간의 감정적인 결정 때문에 넝쿨 같은 범죄의 연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드라마 속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근본부터가 악하고 비열한 사람들이 아니다.

시즌 1의 최종 흑막이었던 이창준 검사장은 본래 누구보다 총명하고 정의로운 검사였다. 후배들이 무릇 존경하는 검사였고, 주인공 황시목이 롤모델로 삼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토록 후회했던 한 번의 사적인 식사자리로 촉발된 사사로운 '감정'은 그를 점점 더 깊은 비리의 숲으로 이끌었다.

시즌 2에서 그에 대비되는 인물은 아마도 최빛 부장일 것이다. 최빛 부장은 여주인공 황여진이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인물이다. 냉철하고 재빠른 판단력과 유연한 적응력, 그러면서도 따뜻한 공감능력을 겸비하고 정보부를 진두지휘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별장에서의 사건을 시작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음모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간다.
 

“저도 제가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라는 이야기를 환자들에게서 종종 듣곤 한다. 어느 순간 돌이켜보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게 결코 올바르지 않고,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인데 지나고 보니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되어버린 경우를 우리 모두 맞닥뜨리곤 한다.
 

“검사님은 그러시면 안 됩니다. 검사님은 법을 수호하시는 분입니다.”

황시목은 교과서 같은 대사를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내뱉는다. 맞는 말만 골라서 따박따박 읊어댄다. 그런데 그걸 누가 모르겠는가. 누가 나쁜 걸 몰라서 나쁜 짓을 하고, 잘못된 걸 몰라서 잘못하겠는가.

최빛과 이창준도 마찬가지이다. 처음부터 거대한 음모를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의 ‘감정적 판단’들이 그들을 돌이킬 수 없는 길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반복되는 사소한 오류가 누적되었을 따름이다.

관례를 어기면 보복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혹시나 잘못되어 인생이 꼬이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선배의 난처한 상황을 볼 때의 ‘안타까움’.
나는 높은 사람이니 그렇게 해도 된다는 ‘도취감’.

순간순간의 수많은 감정들은 중요한 결정을 방해한다. 뇌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감정 담당 영역이 활성화될수록, 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뇌의 맨 앞쪽 가장 바깥 부분의 피질로 가는 혈류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감정은 논리적 사고를 마비시킨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도록 만든다. 논리적 분석보다는 모 아니면 도 식의 일차원적 판단에 의존한다. 과거에 대충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면 엄밀하게 비교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관성에 따라 결정해버린다. 비이성적인 ‘감정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

대니얼 카너먼이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따른 판단을 토대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증명하여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그는 그저 심리학자로서 심리학 이론에 대해 연구했을 뿐인데, 노벨상 위원회는 그에게 경제학상을 수여했다. 그의 이론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엎을 정도로 경제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대니얼 카너먼은 그동안 고전적인 경제학자들이 가정했던 합리적 경제행위 주체를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고 지칭했다. 그런 사람은 이론 속에만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조롱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달리 근거와 계산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감정이 이끄는 방향으로 문제를 속단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어떤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모든 현실적인 조건을 세세히 따지고 엄밀하게 계산하여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못한다. 충분히 숙고했다고 판단하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한다. 즉, 우리는 경제학자들의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즉흥적이고 비합리적으로, 감정적 판단을 근거로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정의가 입력된 로봇

반면 우리의 황시목 검사는 감정이 없다. 때문에 매 순간 모든 결정을 냉철하게 내릴 수 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처럼 모든 가능성을 동등하게 바라보고 놓치지 않는다. 심지어 얼마 전 아들이 끔찍하게 살해당한 노인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용의자로 의심을 한다. 그 탓에 한여진 경위가 기겁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창준 검사장은 황시목을 선택했다. 그는 욕심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었다. 불필요한 감정이 얼마나 무섭도록 일을 그르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시목은 그럴 일이 없다. 이창준은 자신이 다크나이트가 되어 치욕 속에 사라지고 난 뒤 새로운 정의를 바로 세워 줄 하비 덴트로 황시목을 선택했다. 논리와 이성만으로 똘똘 뭉친 검사. 감정이라는 걸림돌에 넘어질 우려가 없는 인물. 정의로 가는 길에는 불타는 열정이 아니라 차가운 이성이 필요하기에 그 적임자가 황시목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상적인 정의의 사자는 ‘뜨거운 심장의 용사’가 아니라 ‘정의가 입력된 로봇’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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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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