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나

[정신의학신문 : 허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P님의 사연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공부하는 것도 싫어하셨어요. 여자는 상고를 가서 남동생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죠.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학벌이 더 좋았던 탓인지, 아버지는 제가 성공하길 바라면서도 본인보다 잘나는 건 용납이 안 되는 그런 이중적인 잣대를 두셨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대학만 가면 끝날 거라는 생각으로 버텼어요. 하지만 대학 생활은 도서관과 알바가 전부였습니다. 매달 생활비와 월세를 벌어야 했고 4년 동안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을 졸업했어요. 많은 친구를 사귀지도 못 했고 동아리 활동 등 다른 활동은 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 때문에 집을 떠나야 했기에 바로 취직을 해야 했고, 제가 가고 싶던 곳보다는 당장 들어갈 수 있는 회사에 취업을 했습니다. 그 탓인지 대기업에 취업하고서도 이 길이 아닌 것 같았고 1년 만에 퇴사를 했습니다. 그 뒤로도 이직을 2번 정도 더 했지만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하지는 못 했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어요. 결혼하는 과정이 평탄치만은 않았어요. 남편은 전문직이었는데 시어머니께서는 좋은 배경에 경제적 여유도 있는 그런 집으로 장가를 보내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반대를 했더라면 결혼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처음엔 반대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상견례를 끝내고 청첩장까지 다 찍고 난 상태였는데 대화 도중에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으면서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결혼을 했고 결혼 전 마찰 때문인지 결혼 후에도 트러블이 계속됐어요.

문제는 그때부터였어요. 저는 제가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거든요. 주변 사람들도 '너 대단하다' 인정해주고 그래서 저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것 같아요. 어쩌면 그거 하나로 그렇게 버텼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난 잘하고 있다. 잘 살고 있다..' 그런데 그게 결혼과 함께 와장창 깨져 버린 거죠.

 

시어머님만 그랬다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것 같아요. 절 정말 힘들게 한 건 '너 정말 대단해'라고 말하던 친구들이었습니다. 막상 제가 좋은 조건을 가진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고 하니 변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죠. 이 친구들이 나를 인정해 준건 내가 진짜 대단해서가 아니라는 걸요. 처음으로 시기와 질투를 받는 거였어요. 그동안은 저를 시기할 만한 것도 없었다는 것이겠죠. 딱히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친구들에게 의지를 많이 해서인지 상처가 더 컸어요.

 

결혼 후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시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내가 잘난 사람이 되면 더 이상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아도 되겠지'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계속 시댁과 트러블이 있었고 남편과도 심하게 싸우는 날이 많았죠. 시댁, 남편과 갈등이 있던 날도 저는 도서관에 갔었어요. 괴로운 마음이 마음속에선 솟구쳤지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처럼요. 아버지를 피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대학만 가면 끝날 거라고 믿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고통스러웠지만 2차까지 왔으니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하지만 2차에서 낙방했고 결국 시댁과도 연락을 안 하게 됐어요. 더 허무하더라고요. 왜 그동안 그렇게 힘들어 한건지 시험도 안 됐고 시댁과 잘 지내는 일도 실패했으니까요. 인내해 온 시간들이 물거품처럼 날아가 버린 것 같았어요. 그렇게 되면서 약간 무기력해졌고 고시 공부도 그만두었습니다. 아주 긴 터널을 나온 기분이었어요. 심신이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뒤 찾아온 건 사람에 대한 불신과 원인을 모를 초조함이었어요.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죠. 가끔은 갑자기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있어서 좋은 곳에 재취업은 힘들 것 같아 남편과 상의 끝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는데… 제가 너무 초조해한다는 걸 느꼈어요.

이제는 절 괴롭히는 사람들도 없고 남편과도 잘 지내고 있는데도 계속 초조합니다. 남편은 지금까지 해온 공부도 있고 하니 합격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생계가 달린 문제도 아닌데 왜 혼자 초조해하는지 제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저도 해왔던 공부가 있으니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것이 가능성도 높고 안정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도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혹시라도 안 되면 어쩌지' 라는 생각도 들고…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맞는 건가도 잘 모르겠고…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초조한 마음 때문에 집중을 하기가 힘듭니다. 그렇다고 전업주부로만 살 자신도 없어서 아무것도 안 하기도 힘들 것 같아요.

저는 왜 이런 걸까요. 어떻게 해야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까요. 이제 좀 편안한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뇌부자들의 답장

 

P님 안녕하세요, 뇌부자들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을 인정해주던 친구들이 돌변한 모습에 정말 힘드셨겠어요. 부모님은 이혼하시고 아버지와 사는데 아버지에게는 의지할 수 없었던 사연자분께 친구라는 존재는 정말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사람들이었을 텐데 변해버린 태도에서 오는 좌절감은 엄청나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 힘드셨던 부분은 시어머니에게 들었던 말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어머니와의 대화 도중 나왔다는 그 예상치 못한 말, 그리고 그 이후 남편의 반응이 P님을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떤 맥락에서 친구들이 시기와 질투의 말을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쩌면 친구들의 그런 이야기 중 일부는 큰 의미 없이 던진 말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너져버린 상황에 평소라면 넘겨버릴 이야기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지는 않으셨을까 하는 가정도 해봅니다. P님께서 ‘제 생각에 자부심은 높다’고 표현하셨지만 이혼 가정, 친구들과 비교되는 대학생 등 끊임없이 자존감에 손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계셨던 것 같아요. 낮아진 자존감도 친구들의 말을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이는데 영향을 줬을 수도 있겠지요.

결혼 후에도 지속되는 시댁과의 갈등 상황에서 남편이 중간에 중재를 해줄 것을 바라고 또 의지할 수 있는 대상 되어주기를 바라셨을 텐데 그게 안 되다 보니 너무 힘들어 남편과도 싸우게 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전까지는 노력으로 얻어낸 학업, 취직 등의 성과물들로 낮은 자존감을 보상했지만 시어머니가 지적한 집안 배경은 아무리 애써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그동안 내가 아무리 노력해왔어도 결국엔 어쩔 수 없구나’라고 좌절감이 들기도 하고 그간 노력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을 것이고요.

 

사진_픽셀

 

결국 ‘전문직인 남편과 비교해서 그래도 내세울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가장 잘할 수 있고 잘 해왔던 고시 준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시게 된 것 같아요. 시험이라는 수단이 그동안 P님께서 자신의 가치를 보여 주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선택해온 방법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에선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을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고, 졸업 후엔 대기업에 취직을 하셨죠. 물론 생존을 위한 노력이기도 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함으로써 주위의 인정을 받는 과정을 통해 낮은 자존감을 보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그런 방법이 성공을 거두었는데, 고시에 낙방하면서 실패를 경험하셨으니 많이 초조하실 수밖에 없겠네요.

아버지를 피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그 시절처럼 지금의 힘든 상황을 공부로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괴로운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하시는데 공부라는 인지적인 방법으로 힘든 감정을 격리하셨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대학만 가면 힘든 상황이 끝날 것처럼 여겼던 그때처럼 고시만 합격하면 지금의 힘든 상황이 해결될 거라고 믿고 계실 수도 있겠죠. 힘든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자꾸 실패하셨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P님께서는 항상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노력해 오셨어요. 이제는 남들의 기준이 아닌, 진정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이미 친구 분들을 통해서 타인의 인정이라는 것이 시기와 질투 앞에선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부질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으셨잖아요. 그런데도 지금 또다시 그 덧없는 걸 손에 쥐기 위해서 정말 많은 걸 쏟아붓고 계시는 듯합니다. 먼 미래의 행복이 아닌, 지금 이 순간, 현재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셨으면 좋겠어요. 의외로 진짜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저희의 조언이 P님께서 마음의 안정과 함께 행복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뇌부자들 드림.

 

 

[뇌부자들을 팟캐스트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Podcast : https://itun.es/kr/XJaKib.c

팟빵 : http://www.podbbang.com/ch/13552?e=22562559

팟티 : http://m.podty.me/pod/SC1758/9494661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