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A씨의 사연

 

안녕하세요. 어떻게 무엇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언제부터인가 저는 가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가 되어 위급한 환자를 살려내는 장면 같은 상상들을 말이에요. 공부하기 싫을 때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자극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는 제가 이런 상상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만든 어떤 상황의 주인공이 되는 그런 상상만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저는 그 상황에 대해 연기하고 있습니다. TV 속 영화나 드라마의 배우들처럼요. 거울을 보면서 표정을 짓거나 웃을 때도 있고, 간혹 대화도 합니다. 혼자서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얼굴을 보면서 스스로 세뇌를 하기도 합니다. 마치 제 얼굴인 것처럼요. 그럼 어느 순간부터 제 얼굴에서는 그 연예인의 분위기가 나기도 하고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을 상상합니다. 이렇게 거울을 보면서 연기하느라 4~5시간을 보낸 적도 있을 정도로 제 스스로 통제가 안 되기 시작했습니다.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이런 공상들 때문에 집중을 못해 성적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울을 없애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인가요? 제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유가 있을까요?

 

사진_픽셀

 

 

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뇌부자들입니다.

사실 누구나 살면서 공상을 하는 일은 너무 흔하기 때문에 사연의 내용에 일견 공감 가면서도, 특이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보통은 무료할 때나 잠이 안 올 때 공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연자 분의 경우 해야 되는 일이 있는 상황에서 하게 된다는 점, 다소 과도한 시간을 소모한다는 점, 그리고 머릿속 상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 연기로까지 이어진다는 점까지요. 분명히 처음에는 대학병원의 의사로 일하는 상상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동기를 얻는 수준이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공상 속에 갇혀 있다고 스스로 표현하실 정도로 조절이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공상을 하는 이유로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현실을 회피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공부를 해야 되는데 손에 잡히지 않고, 공부를 접고 나가기엔 마음이 불편하니 책상엔 앉아 있어야 하고. 이런 상황에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공상이죠. 만화책을 보거나 핸드폰을 만지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명백히 공부를 방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죠. 반면에 사연자 분의 공상은 공부의 동기를 얻기 위해서라는, 비교적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공부로부터 도망치면서도 죄책감을 피해갈 수 있다는 심리적 이득을 가져다줍니다.

 

사진_픽사베이

 

그렇다면 이러한 공상을 다소 과도하게 긴 시간 동안 사용하고, 연기를 할 정도로까지 더욱 공상에 빠져들어가야만 했던 심리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답은 공상의 내용을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대학병원 의사와 연예인. 이 두 가지가 사연자 분의 입장에서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우월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환상(fantasy)이라는 방어기제는 현실에선 갖지 못한 것을 상상 속에서 성취함으로써 좌절된 욕망을 일부 충족시켜주는 기능을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괴물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강력한 힘이나 마법이 있다고 상상하고 괴물을 무찌름으로써 공포를 이겨내는 것을 들 수 있죠. 이 예시에서 알 수 있듯 성인기에 나타나는 환상은 성숙한 방어기제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뻔히 사실이 아닌 것을 상상함으로써 심리적 고통을 달래고 위안을 받는다는 게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연자 분께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만큼 성취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기 때문이 아닐까요?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황에서는 일시적인 퇴행이 일어나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사용하기도 하거든요.

정리해보자면 사연자 분께서는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환상의 방어기제를 사용한 백일몽(daydreaming)에 빠져들어가게 되었고,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동시에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로 인해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아요.

 

사진_픽사베이

 

어떻게 해야 이 백일몽에서 깨어나 현실에 집중하게 될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충분히 환기시키고, 동시에 적절하게 스트레스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백일몽을 대체해 나가야겠죠. 궁극적으로는 자존감을 단단하게 다져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해야 될 것이고요. 그런데 이런 원론적인 대답이 분명히 맞는 길이겠지만, 일단 당장의 백일몽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 또한 중요하겠죠.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짧은 주기로 핸드폰 알람을 맞춰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갑자기 큰 소리로 벨이 울리게 되면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다가도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되잖아요. 시간대 별로 알람을 설정해 둔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백일몽 속을 헤매다가도 현실로 날 꺼내 줄 일종의 ‘버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겠죠.

거듭 말씀드렸다시피 사연자 분께서 자꾸만 백일몽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그만큼 힘든 현실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백일몽은 당장은 현실을 잊게 해줄 만큼 달콤하더라도, 결국엔 그 맛에 중독되어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 위험성도 가지고 있어요. 힘들더라도 눈앞의 현실을 조금 더 직시하고 용기 있게 헤쳐 나가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뇌부자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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