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손정현 연세휴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원장]

 

 

H씨의 사연

 

저장강박증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제 남동생이 제가 정리를 못하고 대충 쌓아놓고 지내다가 정리하고 그러는 걸 보고 저장강박증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얘기를 듣고 증상을 찾아보니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사실 몇 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저장강박증 심하셨고요, 외삼촌께서도 상담을 통해 진단받으신 건 아니지만 저장강박증 증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두 분 모두 생활용품이나 휴지, 옷이나 우산, 식기류 등등을 쌓아놓고 못 버리게 하셨거든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인데, 생각해 보면 20대 초반에도 그랬던 거 같기도 해요. 치료를 받아야 할까요? 약물치료 말고 행동치료나 인지치료도 있다는데, 뭐부터 어찌할지 고민이 깊네요. 어찌해야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29살 여자인데, 젊은데도 이런 저장강박증이 생길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뇌부자들의 답장

 

H 씨 안녕하세요. 물건을 쌓아놓고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고민이 되어 사연을 주셨네요.

사실 '나는 늘 바로바로 정리해서 물건이 쌓이거나 지저분한 일은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H님은 이렇게 사연을 보내시게 될 만큼 고민이 깊으시다니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으신 것 같아 조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H 씨가 본인의 습관에 관해 고민하는 데에는 아마도 전부터 봐온 외가 식구들 모습의 영향이 클 것 같아요. 말씀해주신 두 분의 모습은 실제로 강박적 저장(compulsive hoarding)은 아닐지 생각이 들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생활공간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만큼의 많은 사물들을 모으고, 그럴 필요나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인데요. 만약 이 때문에 집 안에서의 이동이나 식사, 위생 관리, 경제적 어려움 등 생활에 큰 문제를 겪거나 가족 또는 이웃과의 갈등이 지속된다면 치료가 필요한 질환에 해당됩니다. 저장 강박은 이전에는 강박증의 한 유형에 속했는데, 최근에는 저장 장애(hoarding disorder)라는 별개의 질환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성인의 2퍼센트에서 많게는 5퍼센트까지 이런 저장 증상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병원에 와서 진료를 받게 되는 경우는 훨씬 드뭅니다. 아무래도 다른 정신과 증상들만큼 급격하고 중대하게 일상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그렇겠죠. H님과 같은 젊은 나이에 이 증상이 생길 수 있는지 물어보셨는데, 30대 이전부터 이미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90퍼센트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H님이나 식구분들처럼 일상적 사물 전반을 모아두는 모습이 가장 흔하지만 특정한 사물- 책이나 포장 박스들, 드물게는 동물, 벌레(채집 목적이 아닌)들을 모아두는 저장 장애도 있습니다. 심각하게는 동물 학대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있어 미국에는 관련된 감시 활동을 하는 민간단체도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런 저장 강박이 있을 때, 먼저 이 증상을 유발하거나 동반될 수 있는 다른 원인들을 꼭 살펴봐야 합니다. 가령 우울 기분이 극심해서 의욕과 에너지가 떨어진 상태가 길어지게 되면 생활 관리조차 어려워 저장 강박과 같은 생활상을 보이고, 또 실제보다 더 과하게 스스로의 상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자책할 수도 있겠죠. 만사에 불안과 걱정이 극심한 상태라면 물건을 정리하고 버리는 일조차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상상되는 여러 가능성들에 대한 불안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해 저장 강박과 같은 행동을 보일 수 있을 겁니다. 또 주위 사람(H 씨의 경우 남동생)의 큰 의미 없는 농담이나 지적에도 스스로의 상태에 관해 불안과 걱정이 심해질 수 있고요. 이러한 기분 장애, 불안 장애는 강박증의 40% 이상에서 동반되는 만큼, 동반 질환에 대한 평가가 꼭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노년기에 판단력과 기억력 등의 인지기능이 퇴행하면서 나타나는 치매 증상의 하나로서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모습이 생길 수 있습니다. 초기 혹은 중기 단계의 치매에서 흔하게 나타나는데, 기억력이 낮아지면서 생기는 자기 효능감의 저하와 상실감을 보상받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사진_픽셀

 

이런 저장 강박이 생기는 원인은 뚜렷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 경향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특히 고통스러운 외상적 기억과 연관되어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결과들이 많은데, 성인기 이전에 겪은 상실 경험, 성폭력을 포함한 학대 경험이 이후의 강박성 저장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되풀이해서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으로 인한 고통을 잊고자, 오히려 다른 새로운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내 지속하려 하는데(어찌 보면 자해 행동과 비슷하게요), 그것이 이전의 심리적 상실을 보상하려는 의미로서 저장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해석이 있고요. 다른 연구에서 타인의 감정에 둔감해 의미 있는 관계 형성이 어려운 이들이 사물에 강한 애착이 형성하는 결과가 저장 행동라는 분석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스스로 문제라는 인식이 없기에 아마도 H 씨처럼 본인의 상태를 걱정하진 않을 겁니다.

 

저장 강박에 관한 여러 가지를 간단하게 말씀드렸는데요. H 씨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기저 질환, 공존 증상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나 주위 여러 사람이 보기에 저장 행동으로 인해 일상에 미치고 있는 악영향이 작지 않다면, 그럼에도 교정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진다면 정신과적인 평가와 도움을 받으시기를 권유드립니다. 이 증상은 사실 단기간 내에 치료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약물치료, 그 외에도 생각과 행동의 잘못된 패턴을 찾고 교정하는 인지행동치료도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시에 본인도 잘 몰랐던 어려움, 상처가 있지 않은지 마음을 살피며 알아가다 보면 전보다 한결 삶이 밝아짐을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뇌부자들 드림.

 

 

앞으로도 방송에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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