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윤희우 연세휴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원장]

 

 

O 님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과 밝은 분위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를 좋은 사람으로 봅니다. 하지만 이런 성격 때문에 남을 시키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를 함부로 대할 때가 종종 있어요. 그래서 사회생활을 할 때 무례한 사람을 만나면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고 거리를 두면서 살았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저랑 맞지 않는 사람, 불편한 사람은 최대한 거리를 두면서 사회생활을 무난하게 해왔는데 이번에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참 어렵습니다.

 

결혼할 때 저는 신랑의 직장이 있는 지역에 신혼집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어머님은 시댁 근처에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남편과 상의 끝에 남편이 맏아들이기도 하고 부모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댁 근처에 집을 얻었고, 남편은 직장이 있는 지역에 숙소를 얻어 일주일에 3일은 다른 지역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저에게 멋진 아들을 뺏겨 얼마나 힘드실까란 생각으로 매일 전화드려 일거수일투족을 알려드렸고, 집에 왔을 때에는 신랑과 매일 찾아가 인사를 드리며 친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언젠가는 어머니가 우리를 믿고 독립을 시켜주실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님과 저는 다른 사람,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자매들과 자취를 하면서 친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일찍 독립해서 거의 모든 일은 저 스스로 해결했고, 결혼도 제가 번 돈으로 살림을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독립적으로 살아온 제게 시어머님은 정말 넘치는 사랑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매일 찾아가는 저에게 항상 맛있는 음식을 챙겨주시고, 이것저것 살림에 필요한 물품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사양했는데, 오히려 어머님이 상처받을까 봐 지금은 챙겨주시는 것을 다 받습니다)

 

저는 상대방을 통해 대리만족하는 삶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예전에 직장생활을 할 때도 드라마를 보면서 대리만족하는 것을 꺼려했고, 그럴 시간에 자기 삶 속의 진짜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은 자기 아들의 삶이 자기의 성공이고 자랑입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를 계속 곁에 두고 싶어 하시고 모든 것에 관여하려고 하십니다. 한 번은 제가 어머님이 자주 가시는 모임에 참석을 안 했는데, 어머님께서는 다른 분들께 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서운하셨는지 한동안 우울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어머님은 항상 "나는 너희들이 내가 원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님의 꿈은 자기 자신을 향하지 않아 있고, 본인의 자녀들이 어머님이 원하는 모양대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님이 자녀들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번씩 어머님이 욱 하고 큰 소리를 내시면 차마 이런 말씀을 드리기 어려워집니다.

 

저는 어머님의 기대와 사랑이 감사하면서도 부담스럽습니다. 처음엔 무조건 어머님이 원하는 대로 맞춰드리면서 살아가자고 생각하고 따랐는데 이제는 조금씩 지쳐갑니다. 어떻게 하면 어머님의 삶의 전부인 아들(남편)과 독립적인 가정을 만들면서 어머님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뇌부자들의 답장

 

O 님 안녕하세요, 뇌부자들입니다.

피할 수 없는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 때문에 고민이 되는 마음을 이야기해 주셨네요. 이렇게 힘든 마음을 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이전에 사회생활을 할 때는 피하면서 그럭저럭 문제없이 지내오셨는데, 피하기 힘든 가족이라는 관계가 되면서 힘들어하시는 것이 느껴져서 저도 사연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네요.

 

사연을 읽으면서 우선 시어머니는 왜 이러시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먼저 들었습니다. O 님이 이야기하신 것처럼 삶의 꿈이 자기 자신을 향하지 않고 아들과 며느리의 삶을 통한 ‘대리만족’을 하려는 것 같네요. O님처럼 시어머니와 며느리, 아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들어본 것 같아요. 진료실에서나 주위에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종종 듣는 고민이지요.

시어머니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동안 같이 살던 아들이 독립해서 나가는 과정에서 역할 전환(role transition)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라고 보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변화가 있을 때, 이를테면 졸업, 취직, 결혼, 출산, 은퇴 같은 일을 경험할 때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역할 전환이라고 합니다. 어떤 역할은 자연스럽게 전환이 되기도 하고, 어떤 역할은 충분히 준비를 하고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전환이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역할은 오랜 시간 서서히 전환이 되기도 하는 반면에 어떤 역할은 한순간에 이루어지기도 하는데요, 시어머니가 아들이 결혼해서 출가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도 오랜 기간 마음의 준비를 하기는 하지만 결국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 과정은 아주 큰 역할의 변화이기 때문에 심리적인 저항도 만만치가 않고,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삶의 목표를 자녀에게 두는 경우가 더 많아서 더욱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화이기도 하지요. 그러다 보니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O님의 시어머니가 이렇게 아들의 새 가정에 집착하고 본인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그리고 특히 O 님이 이 상황을 견디는 것이 힘이 드는 데는 O 님이 이야기하신, 다른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하는 성격이 영향을 주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인이 원치 않는 것은 확실하게 의사 표현을 잘 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웬만큼 싫은 일도 그냥 혼자서 참는 것 같아요. 저희들 중에서도 몇몇은 싫은 일이 있을 때 금세 싫은 티를 내지만 또 몇몇은 싫은 부탁도 떨쳐내지 못하고 들어준다고 합니다.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하지 않으셨지만 O 님은 중학생 때부터 친부모님과 떨어져서 지내셨다고 하셨는데, 평범한 경험이 아니겠다고 들리더라고요. 어느 때보다도 많은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사춘기에, 독립을 하고 오히려 자매들을 돌봐야 했던 경험들은 심리적으로 좋은 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사춘기 시절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주체성을 키우는 것과 누군가의 간섭과 통제를 받는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하고, 그러면서 점차 균형을 찾는 것을 배우는 시기인데요. 이 시기에 갑작스럽게 균형이 무너진 생활을 했다 보니까 결혼 이후에 이래저래 챙겨 주시는 시어머니를 대할 때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듯한 불편한 느낌이 함께 들었을 것입니다.

 

정리해보자면 역할 전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인 시어머니의 문제와, 다른 사람과 적절한 심리적 거리를 두는 것에 서투른 O 님의 성향이 만나면서 지금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O 님의 사연을 들으면서 ‘지금 남편분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을까’라는 점이 자연스럽게 궁금해졌습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모든 역할 전환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남편이자 시어머니의 아들이잖아요? 아들로서 효도를 해야 하는 입장과, 남편으로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만들어갈 입장 사이에서 얼마나 조율을 잘 하느냐가 전체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좌우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O 님이 경험하고 있는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 남편분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특히나 시어머니가 한 번씩 욱 하는 성격이 있다고 하셨는데, 평소에 O 님의 이야기를 충분히 남편분께 한다면 그런 순간에 남편분이 누구보다도 O 님의 편을 들 수 있을 테니까요.

 

여기까지가 저희 뇌부자들이 O 님께 드리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어느 관계보다도 쉽지 않고, 해결책을 안다고 해서 바로 실천하기도 어려운 관계가 바로 고부 관계이기 때문에 저희가 말씀은 이렇게 드리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지 걱정이 남네요. 그래도 저희가 옆에서 같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이나마 O 님의 마음에 위안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뇌부자들 드림

 

 

Podcast: https://itun.es/kr/XJaKib.c

팟빵: http://www.podbbang.com/ch/13552

팟티: http://m.podty.me/pod/SC1758/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