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오동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K씨의 사연

 

저는 30살 여자 애청자입니다. 제 고민은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 저를 괴롭힌다는 점입니다.

가족들과의 무수한 일화, 옛 연애들에서 들었던 모멸적인 말들과 상황들, 유난히 저를 괴롭히던 여자아이들.

그 상황에서는 내가 당하는 거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일들이 뒤늦게 떠올라 울컥하게 됩니다.

제 문제겠거니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지만 결국 이상했던 건 그 사람들이란 걸 깨달아요.

 

과거의 상처를 모두 쏟아내면서 복수도 하고, 사과도 받고 싶어요. 하지만 그대로 해준 건 저희 어머니뿐이었어요.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불화가 심했던 아버지와의 스트레스를 저에게 풀고, 학업으로 압박을 하셨죠. 결국 저는 감정을 폭발시키듯 쏟아냈고, 어머니께선 사과를 하셨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저를 많이 존중해주세요.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어머니 같지 않죠. 그래서 지지부진한 인간관계를 다 청산했어요.

예전에는 저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도, ‘에이, 그래도 쟤는 이런 면도 있으니까'라고 억지 합리화를 하면서 관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존중받지 못하는 관계는 다 끊어냈습니다.

이젠 연애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이던 시절엔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태도로 남자들을 대했는데, 그 결과 저를 존중하지 않는 남자들이 저를 착취했던 것 같아요.

 

제가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몇 년동안, 저는 의지가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 감정과 욕망을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알면 의지는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일기를 쓰고 있는데, 내 감정을 털어놓고 싶어서 막 미칠 거 같던 순간이 줄어드는 게 느껴져요. 물론 일기의 대부분은 아직은, 과거에 대한 불쾌함과 욕이지만요.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살만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순간들은 여전히 제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여져서 마음이 고통스럽네요.

본질적으로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해소해야 앞으로의 생이 풍요로워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기억들에서 저는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사진_픽셀

 

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시진 않았지만 힘든 일들을 많이 겪으셨던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특히 당시에는 당하는 것조차 모르고 넘어간 일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고 하셨잖아요. 사연자 분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이제 와 복수를 하기도, 사과를 받기도 어려운 일이라 더욱 억울하고 화가 나실 것 같습니다.

 

아마도 사연자 분께서는 그동안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억지로 이어 나가려고 하셨던 걸로 보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사회적 민감성이라는 기질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민감성은 다른 사람과 애착을 이루기 위해서 사회적인 보상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입니다.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하고,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상대의 마음에 잘 공감하고 자신의 속마음도 쉽게 터놓지만 상대가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상처받기도 쉬운 타입이죠.

사연자 분께선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이 인생의 모토라고 할 만큼 상대를 배려하고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러다 보니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해서 들여다볼 기회는 그만큼 적었겠죠.

 

갈등이 생겼을 때 ‘내가 문제야’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고 하셨는데, 이것을 내부귀인이라고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외부 상황에서 찾는 대신 자신 내부의 요인에서 찾으려는 성향을 말합니다.

아마도 사회적 관계에서의 보상이 사연자 분께는 중요한 것이었던 만큼 문제가 된 관계를 끊어내기는 어렵고 가장 먼저 ‘내 탓’을 하게 되셨을 거예요. 나만 참고 내가 더 잘 하면 상대에게 인정받고 관계도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 거라고요.

하지만 매사에 내부귀인을 하면 정말 힘들죠.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고통스러운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결국 사연자 분의 생각이 ‘이상한 건 그 사람들’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 것 역시 이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연자분께선 어머니에게 했듯이 사과를 받고 싶지만 그게 어려운 걸 알기 때문에 결국 관계를 정리하는 쪽을 택했다고 하셨어요.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이나 사건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또 인지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하는 ‘회피’의 방어기제가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훨씬 편안해지셨다고 하니 저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견디기 힘들 때는 도망치는 게 필요한 만큼, 잠시 감정이 정리될 때까지는 관계를 피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사진_픽셀

 

역설적이지만 제일 힘든 기억들, 불안과 화를 일으키는 그 일들을 들여다보고 그때의 상황과 내 마음을 깊이 알수록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지금 일기 쓰기를 통해 감정을 바라보는 건 정말 바람직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면 계속해서 과거의 일을 곱씹고 그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이걸 ‘반추’라는 사고 과정으로 설명하는데,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는 데 있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감정을 분출하고 나면, 과거 있었던 일을 돌아보고 그 의미에 대해서 재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하지요.

힘들었던 기억을 억지로 합리화하거나 긍정하라는 게 아니라 나를 압도하고 있던 감정에서 빠져나와 기억을 중립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걸 ‘인지적 재평가’라고 부르는데요, 이건 혼자서 하시기 쉽지 않을 거예요.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고 한들 불쑥 괴로움과 분노가 치밀게 되면 생각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치료자와 지속적으로 면담 치료를 하면서 이 과정을 함께 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들여다보고 정리를 한 뒤에는 이제 시선을 현실로 돌려야 합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에만 집착하면, 현실의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과거가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주었듯 지금이 미래의 나를 결정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사연자 분께서 앞으로는 관계 자체를 피하는 대신,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꾸준히 맺어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정을 들여다보고 정확히 인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대인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긍정적인 대인관계 경험들로 다시 채워나가야 합니다. 때로는 다시 한 번 상처를 받을지라도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만 한다는 거지요.

이미 과거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용기를 내신만큼,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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