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조성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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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에게 밝히지 못한 비밀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병원 가기를 좋아하는 아이 혹은 부모들은 얼마 안 될 것 같습니다.

아기수첩에 아무리 써두어도 복잡하게만 보이는 예방접종들, 처음 편지를 받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영유아 건강검진, 고열, 배탈, 감기 등의 각종 질환들까지. 병원 방문은 상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도 가장 가기 싫은 건 아무래도 당사자인 아이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산부인과, 조리원에서 나와 처음으로 예방접종하던 날이 기억납니다. 딱하기도 했지만, 하도 우렁차게 울어서 옆에서 선생님께 실례가 안 되게 한쪽에서 우는 딸아이의 사진을 찍어두고 ‘인생 최대의 위기’라는 제목을 붙여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에도 병원에 갈 때마다 딸의 우렁찬 울음은 계속되었습니다. 반복해서 같은 병원을 가니 아이는 병원 출입구부터 눈치를 보고 찡찡대기 시작하다가 진료실에서는 항상 큰 울음으로 병원 전체가 떠나가도록 울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하다고 그냥 넘겼는데, 언제부터인지 딸아이가 매번 유난히 찡찡대고 크게 운다는 피드백을 듣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한 지인이 ‘병원놀이’를 추천해주어 반신반의하며 병원놀이 가방을 사주었습니다. 그 안에는 의사 명찰부터 청진기, 이경, 주사기 체온계 등이 들어 있었는데, 아이는 처음에는 시큰둥하더니 이내 잘 기지고 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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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갈 일이 없어 한동안 잊고 지내던 중 ‘영유아 건강검진’이 다가오자 저희 부부는 ‘병원 갈 걱정’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니 혹시나 싶어 검진 날 장난감 청진기와 이경을 가지고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지금 병원에 가면 선생님이 우리 딸 잘 크고 있는지 이렇게 보실 거야. 아픈 거 아니니까 잘할 수 있지?"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딸아이가 처음으로 병원에서 불안해하며 찡찡대지도 않았고 진료실에서도 전혀 울지 않았습니다.

자신감이 붙은 저희 부부는 딸아이의 병원 공포를 완전히 없애주겠다는 생각에 집에 있던 가운을 입고 같이 놀려고 했던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딸은 의사 가운에게까지 관대하지는 않았고 결국 아빠가 의사라고 말할 기회는 못 가졌습니다.

그래도 병원 놀이 가방은 기대 이상의 성과가 있었습니다. 딸은 이제 병원에 가서도 곧잘 있습니다. 아이는 매일매일 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놀이의 위력을 몸소 느낀 일이었습니다. 

 

♦ 놀이의 의미와 기능

부모들은 모르는 사이에 놀이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고 아이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놀이를 하며 변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놀이를 ‘소우주(microsphere)’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놀이가 아이에게는 아직 이해하기 힘든 현실과 사회(macrosphere)로부터 일시적으로 철퇴하여 본인이 다룰 수 있는 장난감을 통해 자신의 감정, 갈등 등을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하여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 및 감정 사이의 의미 있는 연결을 시도하고, 현실에서 실험할 수 없는 사회적 딜레마를 풀어 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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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정신의학 교과서에서는 놀이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소아는 놀이를 통하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배우고, 탐험하여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고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역할 놀이를 통해 성인이 되었을 때의 사회적 역할(부모, 남녀, 직장 등)에 대한 준비와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의존성, 공격성, 애정 등의 본능적인 욕구나 바람을 표현하고 직간접적으로 어떻게 충족하는가를 배울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수동적으로 당하였던 일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공상, 상상 또는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가치를 가르치고 전수하는 수단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 아이의 놀이를 존중해주는 태도

놀이는 아이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자발적이고 능동적일 수 있습니다. 반복적이기도 하나 불안감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고 재미있기 때문에 합니다. 아이들은 재미없으면 play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육에 있어서 아이들의 놀이는 존중해줘야 합니다.

놀이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거나 시간을 허비하는 수단이 아니고, 부모가 뭔가를 특별히 스페셜하게 판을 깔아주어야 이뤄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아이가 놀 때 옆에서 지켜보고 관심을 기울이고 아이가 주도하는 놀이의 흐름을 지켜보거나 거기에 동참하면 됩니다.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뭔가를 해줘야 하는 일들이 많지만, 놀이에서만큼은 아이의 놀이를 존중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노는 주체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 스스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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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놀이에 대해 강박적인 부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아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지난 주말 뭐했어?’라고 묻는 것은 단순한 안부 인사를 넘어서게끔 들리기도 합니다.

아무도 강요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주말 특별히 뭐를 하고 놀아줬어야만 하고 뭔가를 해줬어야만 하는 것처럼 느끼고 부담스러워합니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그 시간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점을 자주 잊어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만큼 관심을 기울이고 아이의 놀이를 존중해주고 답답하더라도 기다려주고 그 놀이에 우리 부모들이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쉼 없이 뭔가를 해줘야 하고 특별한 것들을 해주는 것이 꼭 좋은 놀이는 아닙니다. 아이를 믿고 아이 스스로의 공간을 내어주는 존중이 있을 때 아이도 부모도 즐겁게 놀 수 있고 놀이가 온전한 기능들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조만간 "뭐하고 놀까?"하고 물었을 때 딸이 스스로 병원 가방 놀이를 들고 와서 함께 놀며, 아빠가 의사인 것을 알려주는 날이 올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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