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손정현 연세휴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원장]

 

B씨의 사연

저는 미국에서 유학 중인 학생입니다.

10년 전 한국을 떠나 이 곳에 와서 학사, 석사 과정을 마치고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보자는 마음으로 박사 과정까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전 유학생활하는 동안 장학금으로 학비를 모두 충당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지냈습니다.

몸이 아플 때 집에서 금전적 도움을 주신 적이 있지만 크게는 부모님 도움 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박사 과정부터는 월급도 받아 넉넉하지는 않아도 쪼들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고요.

나름 그런 면에서 제 자신에게 뿌듯했는데 서른이 된 작년부터 갈수록 자존감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공부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부모님의 눈치가 보입니다. 압박도 주시고요.

제가 공부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시지 않는 부모님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냥 공부를 그만하고 일 해서 돈을 벌기를 바라십니다.

용돈도 드리고, 여행도 보내드리고. 다른 집 자식들처럼 나이 서른 먹었으니 "자식 도리"를 하길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집에 전화할 때마다 말다툼 같지 않은 말다툼으로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 저희 집 사정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냥 단순히 제가 서른 넘어서까지 공부하는 게 싫으신 거죠.

“나는 박사 공부하는 딸이 싫다.”라고 말하실 정도니까요.

 

사진_픽셀

 

부모님께서 어떤 마음인지는 이해가 돼서, 그냥 전화로는 묵묵히 말을 듣고 "네네 죄송합니다"하고 끊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요즘엔 학교에서 하는 연구도 갈수록 어렵고 벅차서 심적인 스트레스가 더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우울한 마음과 감정 기복이 심해져서, 상담을 받는 게 좋겠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학교 병원에서 하는 정신과를 찾아 상담을 받았는데, 문득 이 곳의 의사 선생님들이 저의 고민과 우울증에 대해 얼마나 이해를 하실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부모님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는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고민을 겪어본 경우는 대개 아시아계 학생(특히 유학생들)뿐이지, 저의 미국 교수님들이나 친구들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제 미국인 남자 친구도 그렇고요.

미국 교수들이나 친구들은 "왜 부모님이 너의 공부에 대해 간섭하시는지 모르겠다. 학자금 대출을 받은 것도 아니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왜 서른이 되면 꼭 돈을 벌고 결혼해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합니다.

즉 이해를 못한다는 것이죠.

한국은 아무래도 서른이 되면 직업적으로 자리 잡고 결혼해서 사는 게 아무래도 "정석"이니까요.

부모님의 관점에서는 제가 그렇게 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드셔서 그걸 표현하시고, 그 때문에 저는 마음고생이 있는 건데.

이런 상황을 미국 의사 선생님들이 얼마나 이해를 하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환자로서 그런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할까요?

선생님들께서는 문화적 바탕을 배제하고 상담을 하는 게 가능한지, 또 외국인을 상담할 때 어떻게 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진_픽셀

 

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뇌부자들입니다.

B씨가 타국으로 유학을 떠나 10년간 지내온 이야기를 보며, 의지와 실행력, 적응력이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지금의 B씨에게 인정과 격려보다는 부담이 되는 이야기를 반복하시는 상황이니 얼마나 속상한 마음이 들지 안타깝습니다.

부모님께서 왜 그런 야속한 모습을 보이시는지 궁금한 한편으로, 굳은 마음으로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뤄왔음에도 유독 부모님의 그런 말씀에 괴롭고 흔들리는 B씨의 마음에는 본인도 모를 무언가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10년간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는 생활은 그 자체로 정서적인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성인이 된 후에 외국으로 떠나 생활하면서 피할 수 없는 언어 장벽과 문화적인 이질감이 더욱 외로움을 가중시켰으리라 생각됩니다.

게다가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에서 지내셨다고 했는데, 사람들과 교류하며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할 기회가 적고 외지인에게 거리감이 있는 지역 사회 분위기였다면 더욱 그러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사실 저희들의 경험상으로도, 또 실제 통계를 보더라도 유학생, 또는 이민을 가있는 분들이 여러 이유로 심리 상담을 받거나 정신과 진료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울증, 불안 장애 등 여러 정신과 질환의 위험 요소로 ‘유학’ 또는 ‘이민’이 포함되는데, 피할 수 없는 문화 언어적, 물리적 고립감을 고려할 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겁니다.

B씨께서 최근에 심해졌다고 느끼는 우울감과 감정 기복을 방치하지 않고 상담을 받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라고 믿습니다.

다만 걱정하시는 것처럼,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때, 그 차이에 대해서 100% 이해받기는 힘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그런데 사실 같은 국적, 문화권에서 살아온 환자-치료자 관계에서도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세대가 다른 입장에서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수많은 환자분들이 말씀하시는 경제적 어려움, 학대, 따돌림, 급작스런 사별… 직접 겪어본 치료자가 많지는 않지만, 상담을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상담에서 꼭 필요한 공감은, 그 상황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100% 겪어보거나 이해해야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담자분들이 전하시는 언어적, 비언어적(표정, 제스처, 말투 등) 표현을 주의깊에 살피고 듣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게 공감이니까요.

정신과적 면담의 원칙 중 ‘항상 처음 보는 것처럼, 미리 판단을 하지 말고 임하라’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야만 내담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진실된 감정과 생각을 알 수 있으니까요.

말하는 사람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그로 인한 선입견도 바람직하지는 않고요.

 

물론 문화적인 배경의 차이를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초반에는 과연 이 치료자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불안하고, 답답한 느낌이 없긴 힘드실 겁니다.

이런 상황이 단점이나 한계로 느껴지겠지만, B씨가 지금의 고민과 관련된 사회문화적인 배경과 본인 상황에 대해 진솔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그의 입장에서 느끼게 될 마음에 대해 이해하고 수용할 노력을 하는 치료자(대부분의 치료자가 그러하리라 생각해요)라면 그러한 차이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고, 오히려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해결 방법을 제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한편 지금의 B씨가 느끼는 가장 큰 스트레스가 유학에 대한 부모님의 태도, 의견이라 치료자가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이신 건데, 그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닐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 하시는 연구의 진행이나 유학 생활 전반에서 뭔가 잘 풀리지 않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 오는 정서적인 고통, 불안이 기저에 있으신 것 같아요.

벽에 부딪힌 것 같고, 몇 년 동안 고생한 게 헛수고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가뜩이나 심한데, 가장 중요하고 가까운 사람인 부모님은 옆에 없는 채로 그 불안을 계속 자극하시고. 이런 상황에 느낄 수밖에 없는 괴로운 마음은, 문화적 차이를 떠나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결국 부모님을 원망하고 바뀔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독립적이고 진취적으로 살아온 B씨가 왜 이렇게까지 힘든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알아나가 보는 게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디 꼭 B씨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치료자를 만나 함께 지금의 슬럼프에서 벗어나시길, 이제까지 해오셨듯이 당차게 꿈을 향해 나아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뇌부자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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