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저는 우울증과 불안, 불면으로 치료받은 지 벌써 햇수로 5년째 되는 환자입니다.

나쁠 때는 자살시도도 했었고 자해도 했었어요. 자해는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10년도 넘게 해왔었습니다.

대학병원에 입원도 했었고 그 안에서 사고도 여러 번 쳤고요.  

 

다행히도 좋은 선생님을 만나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최근 6개월은 정말 잘 지냈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생각도 안 들고, 나쁜 행동도 하지 않았어요. 자해를 끊은지는 2년 정도 됐습니다.

오늘도 외래에 들러 진료도 잘 받고 왔어요. 아직은 한 달에 한 번씩 진료 보러 가는데 선생님께 정말 잘 지낸다고 밝게 웃으며 근황을 이야기해드렸어요. 그래서 약도 조금 줄였고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좋은 상태가 아니었어요.

일주일쯤 전부터 뾰족한 물건으로 자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건 이야기 못했어요. 내내 상태가 좋았는데,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약도 지긋지긋해서 줄이고 싶었거든요.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모르겠어요. 일단 집안에 칼은 숨겨두긴 했는데 저도 모르게 하게 될까 불안합니다.  

저는 왜 이런 걸까요?

그 긴 시간 견딘 것을 처음부터 해야 한다니 너무 겁이 나요. 

 

사진_픽셀

 

A) 질문자님의 상황이 참 안타깝네요.

좋아진다고 믿었던 스스로에 대한 실망, 그리고 치료를 받고 있는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글 곳곳에서 느껴져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부디 힘내시길 바랍니다. 

 

우울증이란 놈은 참 이상하죠. 이제 겨우 다 극복했다 생각했는데, 방심한 사이에 어느덧 다시 내 생활에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겨우 ‘힘든 시기가 끝났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머릿속에 온갖 나쁜 생각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가 어깨에 올라타 있는 것처럼요.

질문자님처럼 최근 안정적으로 잘 지내고 있었다면, 그 좌절이 더욱 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우울증이 원래 그런 거라지만, 참 화가 나고 속상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조언은, 최근 자해 충동이 다신 나타난 상황에 집중하기보다는 5년간의 긴 기간 동안의 경과를 살펴보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노트를 펼쳐 가로, 세로선을 그어  좌표를 만들어보세요.

그리고, 가로선을 질문자님께서 지내온 시간으로 생각하고, 세로선은 자신의 기분 상태라고 가정하고 그래프를 그려보는 겁니다.  

 

아마 5년 전 치료를 처음 시작했을 당시엔 기분 상태는 0점에 가까웠을 것 같아요.

하지만, 가로선이 우측으로 갈수록, 그러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되나요?

파도의 물결처럼 오르락내리락 증감이 있지만, 결국은 서서히 우상향을 그리는 그래프가 그려질 겁니다.

물결의 하단, 그러니까 우울감이 다시 나타나는 시기를 치료적 퇴보(therapeutic setbacks)라 하는데, 이는 회복을 위한 과정에서 생기는 누구나 겪는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에요.

누구나 치료 과정이 평탄하면 좋겠지만, 우울증이란 놈이 워낙 변덕이 심하거든요.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회복에 이르게 되죠.

질문자님도 지금 그런 과정의 일부일 뿐입니다. 

 

사진_www.robynpuglia.com

 

지금 다시 자해 충동이 나타난 상황은 출렁이는 그래프의 극히 짧은 부분일 뿐이죠. 그래요, 눈으로 확인하신 그대로입니다.

또, 질문자님께서 의지를 가지로 치료를 꾸준히 받으며 과거의 자해, 자살 충동, 우울감을 극복해왔던 사실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약간의 출렁임이 있더라도 지난 수년간의 그래프를 보면 회복의 방향으로 삶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을 겁니다.  

 

많은 우울증 환자분들께서, 안정적인 시기를 지내시다가도 기분 문제, 수면 문제, 그리고 질문자님처럼 자살 충동들이 나빠지는 경우를 많이 이이기 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삶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기에 치료 경과 중 약간의 출렁임은 나타날 수밖에 없고  좌절, 낙담할 필요는 없다고, 잘 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리곤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짧은 출렁임에 손을 놓지 않고, 방향을 잘 유지하는 것이겠죠.  

 

질문자님께서 지금 치료받고 있는 선생님께 자신의 속내를 좀 더 솔직하게 말씀하시게 되면 좋겠습니다.

오랜 기간 치료를 받은 관계에서,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아마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 또한 속내를 드러내는 데 걸림돌이 될 거고요.

하지만, 질문자님께서 걸어왔던 방향을 생각하면, 자신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필요한 도움을 구하는 것이 더 건강한 선택이지 않을까요?

또, 작은 출렁임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큰 물결이 시작하는 단계라면, 전문적인 개입이 꼭 필요합니다.

제 치료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도, 나빠진 증상을 숨기고 있던 환자분께서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많이 봤었고, 그때마다 참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치료를 받고 있는 선생님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이런 생각을 고민하여 이 게시판에 올리신 자체가 건강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힘내시고, 멀리서 질문자님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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