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황인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지단님의 사연>

Q) 제가 초,중학교가 붙어있는 학교를 나와서 초등학교 애들이 거의 그대로 중학교로 같이 올라왔어요. 그런데 제가 진짜 친해지고 싶었던 애들이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딱 이상적인 애들이었거든요. 축구 잘하고 좋아하고 잘 놀고 공부도 잘하고.

이유가 어찌 됐든 그 친구들과 친해지지 못했고 학교에서 혼자 다닐 수는 없으니까 별로 마음가지 않는 친구들이랑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녔거든요. 이렇게 애정이 없으니 학교에서만 같이 다니고 학교 밖에서 같이 놀지는 않았어요. 학교 끝나면 그냥 집에 와서 혼자 있었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지금 남아있는 친구도 거의 없고 과거가 후회스러워요. '그때 어떻게든 내가 좋아하는 애들 무리에 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고 그 친구들 SNS를 들여다보고... 매일 이런 생각만 들어서 너무 힘들어요. 어린 시절로 정말 다시 돌아가서 그 친구들이랑 친해지려고 열심히 노력이라도 해보고 싶어요.
 

사진_픽셀

 

A) 안녕하세요, 지단님. 축구를 진짜 좋아하시나 봐요?

저도 질문자님 나이 때 축구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지단도 사랑했죠. 호나우두 다음으로요. 대머리이지만 아름다운 선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저는 쉬는 시간에는 테니스 공으로 복도 축구를 하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운동장에 나가서 축구를 했습니다. 방과 후에도 학원 가기 전까지 축구를 하고, 자주 학원을 가지 않고 플스방에 가서 위닝을 하곤 했죠.

군의관으로 군대에 있을 때는 탁구를 좋아했습니다. 일이 없는 시간에는 종일 탁구장에서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탁구를 쳤습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하얀색 탁구공이 쉴 새 없이 이쪽저쪽으로 오가곤 했죠.

지금은 축구도 탁구도 좋아하지만 배드민턴을 즐겨합니다. 주말에 동호회 사람들과 배드민턴을 치고 맥주 한 잔 같이 하는 것만큼 환상적인 시간도 없습니다.

오랜만에 여기 게시판에 축구 이야기가 나와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았네요.

 

누구나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후회되는 생각들은 하면 할수록 자꾸 자신으로 하여금 과거에 집착하고 얽매이게끔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못한 부분들을 찾아내면 집요하게 들춰내고 마침내는 모든 것이 자신이 잘 못해서 그랬다는 식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버립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과거 속에서만 살게 됩니다.

지단님 말대로 과거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요.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모두들 잘 알 겁니다. 지단님의 더 어린 시절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4살 5살 무렵 혹은 유치원을 다닐 때, 그때는 어땠나요? 그때는 축구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그리고 초, 중, 고등학교에 가서 그렇게 될 친구가 없었을까요?

만약 그때 지금 말하는 그 친구들을 만났으면 어땠을까요? 그랬더라도 지금처럼 후회되지는 않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 무렵에는 친구들보다 ‘엄마’라는 존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단님에게 지금은 동성친구들이 그런 존재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친구가, 그리고 결혼할 사람이, 결혼 후 지단님의 자식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제가 축구를 좋아하다, 탁구를 좋아하다, 배드민턴을 좋아하게 된 것처럼 삶을 살아가다 보면 좋아하는 것들, 취미나 취향뿐만이 아니라 이런 관계적인 부분들을 비롯하여 삶의 모든 것들이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되는 삶 속에는 그때그때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런 즐거움들은 시간이 지나버리면 다시 찾기 힘든 즐거움들입니다.

결혼 후만 생각하더라도, 아이가 있기 전의 신혼 생활, 아내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의 결혼 생활, 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 아이가 기기 시작할 때, 아이가 걸을 때, 아이가 말을 할 때, 모든 생활이 다 다르게 변화하고, 그 속에서 찾아오는 즐거움은 모두 다 다르며 우리를 충만하게 합니다.

하지만 지단님처럼 과거에, 그 시점에만 얽매여 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과거에 즐거웠을 수도 있었을, 혹은 (정말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기적처럼 지단님이 원하는 대로 삶이 바뀌어도) 전혀 즐겁지도 않았을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면, 이런 현재의 즐거움은 전혀 모른 채 지나가게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현재 삶에서 즐거울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세요.

지단님의 나이에 궁여지책은 옳지 않습니다. 지단님이 말씀하시는 궁여지책은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단지 싫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현재의 삶을 피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된다면 조금 더 고민하고, 우울증은 아닌지 상담도 받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그 시절에 사실 저는 축구보다 농구가 좋았습니다. 농구 잘하는 친구들은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거든요. 제가 좋아했던 그 시절의 어떤 소녀도 농구 잘하는 친구를 좋아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키도 작고 점프력도 낮고 뭔가 농구와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농구 잘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 척했습니다. 계속 농구라는 종목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았을 걸 하는 후회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런 생각에 빠져서 그 재미있는 축구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었는지 후회가 되면 후회가 됐지, 농구를 잘 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농구 잘하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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