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입니다.
평소 제 성격은 욕심이 많은 편이고, 완벽을 추구하는 편이라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계획한 일은 그날 끝내려고 노력을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그런 저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고, 무슨 일을 하든지 심지어 놀 때도 무기력해집니다.
학원을 가서 수업을 들을 때도 뭔가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려보내는 느낌이 나고, 분명 수업을 들었는데 듣기 전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죄책감만 느꼈지만, 그러한 감정이 지속되다 보니, 이제는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 곧 개학을 하고 또다시 열심히 공부를 해서 꼭 원하는 대학교에 가서 꿈을 이루어야 하는 중요한 시기가 오고 있는데 제 감정도 잘 모르겠고, 아무리 놀아도, 책을 읽어도, 유튜브로 평소 좋아하는 영상을 봐도, 아무리 휴대폰 SNS를 해도 즐겁지가 않고 스트레스가 풀리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 어제는 학원을 빠지고 친구와 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평소에 학원을 거의 빠진 적도 없었고, 빠지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저 자신이 매우 신기했습니다.

저 왜 이러는 걸까요??
 

사진_픽셀

 

답변) 

제가 시원하게 "이래서 그러는 겁니다!" 알려드리면 참 좋을 텐데, 단편적인 내용만으로는 그럴 수 없어 아쉽네요.
부족하지만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할게요.
질문 글 속에 있는 몇 가지 단어가 눈에 들어오네요.

'완벽', '욕심', '노력' 그리고 '죄책감' 

처음 세 단어는 질문자 분이 어떤 것을 어떻게 추구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완벽에 대한 욕심이 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시겠죠.
마지막 단어는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거나, 그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이고요.
꽤 무거운 삶을 살고 계시네요.
 

질문자 분이 겪고 있는 현상들은 먼저, '완벽'과 관련이 있을 수 있어요.
완벽을 추구하다 보면 깨닫게 돼요.
완벽이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걸요.

하지만 완벽이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일 때, 사람은 겉보기에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해요.
완벽할 수 없다면 아예 시작도 안 하는 거죠.
또는 정말 완벽해야 하는 것만 완벽하게 하고, 다른 것은 손끝 하나 건들지 않기도 하죠.
왜냐하면 내 노력이 실패할 때, 너무 가슴 아프니까요.

목표가 완벽이 아니라 적당히라면, 시도하는 것 자체가 속이 편해요.
하지만 목표가 완벽이라면, 거의 대부분의 시도가 실패이기 때문에, 그 상처를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죠. 

예를 들면, 정말 깔끔하게 꾸미고 다니는 친구가 있어요.
머리 스타일이나, 옷, 사소한 장신구까지 완벽하게 멋있는 친구가 있죠.
이런 친구들 중에 가끔 방은 정말 더러운 경우가 있어요.
그 친구의 방이라는 걸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요.
 

'욕심'과 '노력'과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죠.
욕심이 노력을 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노력이 욕심을 만드는 경우도 있어요.
내 노력이 어떤 기준을 넘게 되면, 내가 노력한 것 하나 때문에 어떤 목표를 포기할 수가 없게 되죠. 
'지금까지 노력한 게 얼만데!' 하면서요.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긴 있어요.
지금 제가 발레를 시작해서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의 공연을 한다는 게 그런 일이죠.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꿈을 보고 달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 점점 그 사실을 깨닫게 되기도 하죠.
일찍 깨닫게 되면 좋지만, 정말 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머리로는 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지금까지 내가 한 노력 때문에 그 사실을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은 방황하게 돼요.
 

마지막으로 '죄책감'.
지금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거예요.
죄책감은 굉장히 강력한 에너지니까요.

지금은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3일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먼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죠.
몇 년 동안 부모님의 묘를 지키곤 했고, 그것을 '예'라고 불렀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의 공급원은 바로 '죄책감'이죠.
불효 역시 이런 죄책감에서 출발하는 거고요.

지금 느끼는 죄책감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완벽을 이룰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죄책감인지, 아니면 노력을 하지 않는 자신의 의지에 대한 죄책감인지, 아니면 내 꿈을 회피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인지는 모르겠네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질문자 분이 죄책감에 마냥 짓눌리고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거죠.
친구와 학원을 빠지고 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요.
 

글을 시작할 때 얘기한 것처럼, 저는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요.
적어주신 글을 보고 몇 가지 가능성을 제안할 수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이 제안을 읽는 것으로 내 내면의 상황과 외부 현실이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꽤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어요.

자기 자신이 이해가 되면,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해지실 수 있어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신다면, 결과가 완벽하지 않더라고 자기 자신을 칭찬하고 사랑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한 번쯤은 학원을 빠지고 친구와 놀아보세요.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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