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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한가운데에서 찾는 당신 삶의 의미

기사승인 2020.03.02  00:3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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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간다. 숨을 쉬고, 눈을 깜빡거리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을 잃었다. 우리는 내킬 때 외출할 수 있는 자유를 잃었다. 이제 우리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나가기 전 거리에 사람들이 얼마나 돌아다니는지를 확인한다. 우리는 마음껏 얼굴을 드러내고 맑은 공기를 쐴 수 있는 자유를 잃었다. 대신 우리의 코와 입에는 KF94 마스크가 자리하고 있다. 이전에 우리는 마음껏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면하고 원하는 만큼 그들의 눈을 바라보고 원하는 만큼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우리의 귀로 듣고 즐겼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없다. 아무리 각력이 뛰어난 사람의 높이뛰기도 중력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이 거대한 초국가적 질병의 대유행 앞에서 한 개인의 능력과 정신은 지면과 하늘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고 무기력하기만 하다.
 

사진_픽셀


나는 이 상황을 보면서 진료실에서 겪었던 수많은 심부전 환자와 암환자들을 떠올린다. 그 어떠한 정신도 육체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 자체도 이미 우리 뇌에 입력된 과거의 기억이라는 필터를 거쳐 인식한 개인적인 정보들의 집합이다. 한 사람의 육체의 생명이 끝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세계의 멸망인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세계라는 것은 그 사람이 인식하고 살아가며 새겨진 육체의 흔적과도 같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멸망이 약속된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갇힌 시한부 환자들의 생존을 건 투쟁들.  

외과의사처럼 짧은 순간에 환자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정신과 의사지만, 나에게도 환자의 치료 성공 여부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은 있다. 축구선수가 공을 차는 순간 골문을 뚫고 들어가는 미래를 직감하는 것처럼 환자를 치료할 때 나는 습관적으로 그 환자의 회복된 모습에 대한 이미지를 그린다. 가정과 학교에서의 오래된 학대로 자신과 세상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 외톨이가 용감하게 아르바이트 구인 면접에 나가는 미래를 그린다. 반복된 공황발작으로 인하여 사시사철 불안에 떠는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잊고 ‘아 한때 그런 병이 나한테 있었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미래를 떠올린다. 그렇기에 완벽한 정신이나 완전무결한 삶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나라도 지속적으로 환자와 나 자신을 독려해가며 이들의 정신에 대한 탐색을 지속해나갈 수 있다. 이 터널의 끝에는 평온과 행복한 삶이 존재할 것이라 어느 정도는 믿기 때문에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세상 그 자체가 멸망한다면 어떨까? 개인이 스스로의 정신과 육체를 어떻게 갈고닦든 간에 세상 그 자체가 무너진다면 이 무력한 인간은 무엇을 동력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정신의 개변만으로는 도무지 극복해낼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의 크기 앞에서 정신의 전문가라는 허울 좋은 타이틀은 무장한 군인의 총구 앞에서 벌벌 떠는, 도서관에서 책 좀 읽어본 얼굴 하얀 대학생처럼 볼품없이 작아져 간다. 

내가 만난 뇌병변 환자들의 변형된 뇌영상 앞에서, 그들의 잃어버린 표정과 언어 앞에서 의사로서의 내가 그랬고, 점점 줄어드는 심부전 환자들의 좌심실박출률 앞에서 하잘 것 없어지는 나의 자랑인 약물과 정신치료가 그랬다. 도저히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다. 허혈성 손상으로 기능을 잃은 뇌가 씻은 듯이 나을 리가 만무하다. 수많은 대가들을 거쳐 갔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한 심장을 가진 이들이 몇 세션의 정신치료로 벌떡 일어나서 힘차게 뛰어다니며 밝은 미소를 지을 리 없다. 그들에게 지금 이 시기를 견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래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당면한 문제의 원인을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찾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곧 멸망할 미래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금 여기’를 믿으라고 할 수 있을까?
 

사진_픽사베이


그리고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는 나도 이 재난의 당사자이다.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바이러스의 전염력 앞에서 수백 명의 감염자와 무너져가는 사회의 분위기와 기간시설 앞에서 감염 전공도 아닌 한 의사는 무력하기만 하다. 이 와중에 개인의 노력이나 정신의 회복이 의미가 있을까? 나도 굴복해버린 이 공포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극복하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시시각각 늘어가는 희생자 숫자는 나에게도 닥쳐올 수 있는 미래가 되어 나의 목 또한 옥죄어 온다. 내가 진료실에서 했던 모든 조언과 해석은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 앞에서 ‘살아보니 세상이 원래 그래.’라고 얘기하는 조숙한 꼬마의 허세처럼 진정성과 무게를 잃고, 나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믿음직한 정신의 수호자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실려 죽음의 수용소로 떠나는 창백한 얼굴의 수형자가 된다.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선별 진료소 안에서 마스크와 장갑과 보호장구로 몸을 칭칭 두르며 5분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최대한 멀리 떨어져 진료를 보며 그리고 다시 나와 보호장구를 벗고 나의 손을 하염없이 비누와 알코올로 소독하며, 혹시라도 나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감염자가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고, 나로 인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 동선이 밝혀진 나와 내 가족의 처신의 부주의함에 온 세상의 비난이 집중될 상상을 하며 나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는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그토록
점잖고도 동정적이고도 비판적일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내가 그 당사자가 될 리 없다는
아주 막연하고도 비현실적인 믿음 덕분이었다.

 

나만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진 후의 생각은 그 이전과는 얼마나 다른가. 머릿속에서 상상만 하던 세상의 고통과 내 피부에 닿는 현실의 고통은 얼마나 다른가. 평온할 것이라 믿었던 내 세상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불현듯 나는 떠올렸다. 결코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던 그 많은 죽음을 약속받은 사람들. 그들의 변화 없음마저 당면한 현실을 타계하기 위한 어떤 몸부림이 있기에 가능했음을.

너무나 쉽게 말하고 너무나 쉽게 비판하고 너무나 쉽게 조언했다. 나 또한 죽음과 언제든 맞닿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맞게 될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평안하게 맞이하는 죽음일 수도 있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고독한 길 위의 죽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환자의 정신과 나의 정신을 진정으로 같은 선상에서 올려놓고 본 적이 있는가? 질병에 감염될 수 있다는 생각, 온 세상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이렇게 불안하고 무력해진다. 이 불확실한 현재에서, 언젠가 약속처럼 다가올 운명으로부터의 채무에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이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가?
 

사진_픽셀


하루에 수백 명이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지던 강제수용소에 갇혔던 유대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그 자신도 그 학살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포함한 인간군상의 면면을 관찰한다. 누군가는 당면한 현실의 심각성을 부정하며 죽음이 결코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집행유예의 망상에 빠졌다. 누군가는 냉담해졌다. 다가온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머지 감정이 없는 식물이 되어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했다. 누군가는 혐오주의에 몸을 던졌다. 타인을 혐오하고 차별함으로써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세상의 위협에 불안해하는 대신 그 위협의 일부가 되어 당면한 심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반면에 어떤 사람에게는 시련은 해결해야 할 인생의 과제가 되었다. 평소에는 결코 같은 선상에서 놓고 볼 수 없었던 인간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걸고, 의사에서 벗어난 한 명의 인간으로서 평소에는 가질 수 없었던 시선으로 자신의 시련을 관찰하였다. 누군가는 동료를 만들었다. 혼자만의 세상에서 고독한 불행의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불행과 시련을 곁에 있는 누군가와 나누며 자신의 시련을 운명이 아니라 세상 속의 한 현상으로 편입시켰다. 정말 드물지만 어떤 사람은 성인이 되었다. 자신의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더 약한 타인을 우선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내적 세계의 주체가 되고, 운명의 희생자 대신 주인공이 되는 것을 택했다. 어떤 의미로는 시련을 이기기로는 더할 나위 없는 행위이기도 했다. 자신의 시련을 재정의하고, 내적 세상 속에서의 희생자가 될지 영웅이 될지 스스로의 위치를 정하는 것. 이러한 이들에게 시련은 각각 연민과 도전,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온다. 나에게 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때마다 나는 본인의 삶을 지속해나가며 생각해보도록 권유하곤 했다. 막상 나도 그 삶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젊은이들이 이제껏 살아왔던 현재, 아우슈비츠 수감자의 생활, 전 세계적으로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심각도도, 장소도, 시대도 당연히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믿어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시기. 당연히 오리라 믿었던 내일이 없는 시기, 과거와 부모님과 선생님들에서 더 이상 배울 수 없는 시기. 평생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전통과 상식이 무너지고, 내가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노력하면 충분히 운명을 이겨내고 원하는 세상으로 도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치 아기 때부터 운명을 결정하는 수저를 물고 태어난 양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예측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세상.

이 가운데에서 빅터 프랭클이 내린 결론은 항상성이 아니라 역동성이었다. 식물이 되어 남이 정해준 환경 하에서 마음의 안정과 평온을 찾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신이 정한 장소에서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적극적인 정신의 행위. 심지어 항상성이야말로 역동적인 행위였다. 우리가 분당 20회 남짓으로 일정하게 숨을 쉬는 그 당연하고도 일상적인 행위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장기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가? 한 번 멈춰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의사와 간호사, 영상기사, 가족 등이 필요했던가? 평온하다고 믿었던 우리 삶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원래부터 많은 움직임과 갈등, 욕망, 재난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지키고 있었던 외줄 타기와 같은 것이었고 끊임없이 강요받는 역동적인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전 세계를 휩쓰는 거대한 현상 앞에서 또 한 번의 선택을 앞두고 있다. 

 

염세주의자는 매일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면에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낸 달력의 뒷장에다 중요한 일과를 적어 놓은 다음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 있는 그 풍부한 내용들, 그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반추할 수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이제 불안해할 때마다 스마트폰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보는 습관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여러 갈래의 길 위에서 어떠한 길이 생명의 길로 이어져 있고, 어떠한 길이 죽음의 절벽으로 이어져 있는지 그 누구도 모르는 상황이다. 선택의 압박 앞에 서서 전통으로, 다수의 의견으로, 또는 쉽게 미워할 수 있는 누군가를 혐오하는 행위에 기대어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 또한 이해한다. 물론 마스크 확보, 손 씻기를 비롯한 위생개선, 외출 자제, 질환에 대한 정보검색 등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 굴복하고 집단 심리나 전통에 편승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당신의 판단을 도와줄 눈과 귀 대신이 될지 몰라도 지금의 시련을 정의할 정신의 자유를 호시탐탐 침해하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오는 수많은 이들은 정신세계에서의 역동성을 잃은 이들이다. 결과를 알 수 없는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선택할 용기를 잃고 영영 그 갈래길에서 멈춰 서서 떨고 있는 이들이다. 설령 같은 액수의 돈을 날려버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스스로를 위해서 돈을 낭비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고 다시 돈을 벌러 나간다. 하지만 남에게 맡겨두고서 결국 사기당한 사람은 남은 평생을 돈을 버는 대신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으로 인생을 소비할 것이다.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오는 책임은 채무가 아니라 선물이었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짐으로써 한 선택이 일단락되고 우리는 옳으면 옳은 대로, 틀렸으면 틀린 대로 다음의 선택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다. 

사진_픽사베이


사태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대재앙으로 끝날 수도 있고, 생각보다는 적은 피해로 넘어간, 그렇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사태로 끝날 수도 있다. 진정한 위기는 코로나 사태 이후의 경제위기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스스로를 재난이라는 수용소에 끌려가는 초라한 유형자에서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한 키를 쥔 선장으로 바꾸어 놓을 필요가 있다. 

선택하라. 누군가에게 있어서 지금의 이 시련은 권력을 잡기 위한 기회일 수도, 기득권을 수비하기 위한 방파제일 수도,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할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 있어서는 조금 더 현명해지기 위한 기회일 수도, 자신의 가치와 정신의 강함을 시험하기 위한 시험일 수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위한 계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틀렸다면 다시 선택하라. 절대 자신의 인생의 선택권을 페이스북에, 집단 심리에, 남들에게 넘기지 말라. 코로나 바이러스보다는 잃어버린 당신의 정신의 자유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살아라. 먼 미래의 당신이 과거의 선택을 후회한 나머지 신에게 간절히 빌고 또 빌어서 얻게 된 두 번째의 기회처럼 지금을 살아라. 전통이, 다수의 의견이, 불안의 부정이, 정치가가 책임져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급적이면 내가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증오도 멈췄으면 한다. 왜냐하면 시련을 통해서 누군가를 지나치게 미워하기 시작한 순간, 끊임없이 역동적이어야 할 인생의 선택이 멈춰버리고 정신의 여정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이 코로나 사태는 당신이 겪을 마지막 시련이 아닐 것이다. 

 

어째서 어류나 파충류, 양서류와 달리 인간만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추상적인 공포를 가지는가. 우울증에 시달리는가, 불필요한 불안에 시달리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서 삶의 방식을 바꾸는, 본능마저 이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을 택할 수 있는 동물이다. 보장된 미래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사태는 당신에게 있어 당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폭탄인가, 창밖에 내리는 폭풍처럼 지나갈 시련인가, 아니면 당신의 가치를 시험할 기회인가. 당신이 정해야 한다. 시련은 언젠가 또 다른 얼굴을 하고 당신의 인생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때에도 여전히 당신은 시련의 의미를 스스로 정하고 그 선택에 용감하게 책임질 역동적인 정신을 가진 주인공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보장되지 않는 이 불확실한 현재에서 당신은 처음부터 자유였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계속 살아나가게 할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권순재의 <영화 속 마음을 읽다>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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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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