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구로 연세 봄 정신과, 박종석 전문의] 

 

A씨는 2년 사귄 여자 친구에게 얼마 전 이별을 통보받았습니다. 

A씨는 매달리고 빌었지만 카톡도 차단당하고, 수신거부를 당하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남자가 생겼거나, 아니면 내가 3년째 취직을 못하는 백수라서 그렇구나.’

2년 동안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우리가 얼마나 즐거웠는데, 이렇게 끝내다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12시에 여자 친구의 집으로 찾아가 ‘너 지금 안 나오면 나 죽어버릴 거야.’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웃기지 마. 넌 그럴 용기도 없어.’라는 답변에 오기가 생긴 A씨는 편의점에 들러 칼을 사 온 후 손목을 조금 그었고 사진을 찍어서 전송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놀라서 뛰쳐나왔고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습니다. 실제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그 효과는 놀라웠습니다. 그렇게 냉정했던 여자 친구가 다시 만나준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A씨는 여자 친구가 연락이 되지 않거나 자신과 만나주지 않을 때, 다시 헤어지자고 할 때 손목을 그었습니다. 

‘제발 우리 그만하자, 이러면 우리 둘 다 힘들고 망가져.’라며 여자 친구가 울면서 호소했습니다. 

‘너 나 버리면 나 죽이는 거야, 살인자나 마찬가지야.’
 

사진_픽사베이


이것은 명백한 폭력입니다. 자해를 가장한 타해이자 폭력인 것입니다. 

A씨 자해는 실제 자살 사고에 기인한 충동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자해를 수단으로 타인을 교묘히 조종하고 자신의 이득을 도모하는 경계성 인격성향과 반사회적 인격성향에 해당합니다. 

A씨 같은 이들은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혼자가 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지속적인 유기 불안에 시달립니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공격하고, 죄책감을 유발해 자기가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조종하는 것이지요. 충동적이고 감정기복이 심한 언행을 보이고 교묘한 말로 남 탓을 하는 등 manipulation과 투사, 가스라이팅 등의 모습을 자주 보입니다.

 

이들은 반복적으로 자해행동을 하지만 대부분 신체에 큰 손상이 없는 가벼운 정도로만 그칩니다. 타인에 대한 불신은 물론이고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감도 없어져 모든 일에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기에 연인이나 가족에게 더 심하게 집착합니다. 

‘너까지 나를 버리진 않을 거지?’라는 죄책감을 주면서 말이지요.

상대를 의심하면서도 집착하는 의존적인 양가감정을 가지는 이들은 자신이 홀로 남겨지는 것을 하루도 참지 못하고 연인이나 가족을 먼저 배신하기도 합니다. 늘 불안하고 외롭기 때문에 자신을 돌봐줄 새로운 상대를 계속 찾으려 하고, 또 똑같은 집착과 실망을 반복합니다.

 

사실 이들을 치료하는 방법은 쉽지 않습니다. 이들의 불안감, 문제의 발단은 애초에 어머니와의 불안정한 애착, 가족이 준 실망감에서 기인하기 때문이지요.

경계성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쉽게 퇴행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자신은 어떤 일을 해도 용서받아야 한다고, 내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연인이나 가족의 조언을 잔소리나 비난으로 오해하고 크게 화를 냅니다. 주변의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더 심하게 분노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경계성 인격성향을 약물로 치료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처방한 약물을 자해의 도구로 사용해서 위험해지기도 합니다. 상담치료는 무척 많은 시간이 걸리며 무엇보다 당사자와 치료자 간의 믿음과 인내심이 요구되는데 당사자는 스스로의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기에 더 어렵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분노와 충동, 미성숙한 행동 모두를 감당하고 인내할 한없이 넓은 마음을 가진 누군가가 이들을 안아주는 것뿐입니다.(어린 시절, 이들의 어머니가 해주었어야 할 행동이지요.)

욕을 해도, 눈앞에서 자해를 하고 무수한 비난과 폭력을 퍼부어도 이들을 절대로 떠나지 않아야, 비로소 이 끝 모를 허무함과 불신은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이는 사실 A씨의 여자 친구는 물론 어머니라도 불가능에 가까우며 누구도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기 힘듭니다. 마더 테레사라고 할지라도 어려울 겁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그런 사람들과는 무조건 헤어져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정신 차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형제나 가족인 경우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데 아내가 그런다면? 단순히 차단하고 분리하는 방법으로는 이들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내가 도망치고 회피한다면, 새로운 대상을 찾아 같은 패턴을 반복할 뿐이지요. 나야 괜찮을지 몰라도 새로운 피해자가 생길 것입니다. 

우선 이들에게 너무 감정적으로 지치고 상처 받은 가족이나 연인 대신 전문가와 상담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을 녹음하거나 녹화해서 직접 보기를 권합니다. 경계성 인격성향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또한 타인이 아무리 조언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미성숙한 모습을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여자 친구와 통화한 내역을 다시 들었을 때 A씨는 자신에게 소름이 끼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지만 1주일도 못 가서 자해와 집착은 반복되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스스로에겐 정말 끝도 없이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극도로 엄격하다는 것입니다. 아주 짧은 반성을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이 그럴만한 이유를 여자 친구가 제공했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며 계속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녹음하고 또 보여줘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기대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또한 가능하다면 경계성 인격성향을 가진 이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마음을 기대 보는 것을 권합니다. 모든 사람을 불신하고 충동적이고 예민하며 일관성 없는 이들도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그리 쉽게 남을 배신할 거란 생각은 잘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종교로 만난 사람들과 대인관계 역시 물론 어렵겠지만 성당이나 교회에는 다른 공동체에 비해 훨씬 인내심이 많고 너그러운 집단입니다. 허용적이고 수용적인 그들의 태도와 배려가 이들의 닫힌 마음을 변화의 시발점, 최소한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완전한 해결책은 아닐 겁니다. 플랜 B나 C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단지 눈앞에 그 어떤 것에라도 우선 의지해야 할 만큼, 이들의 끝없이 허무한 마음이 치유하기가 어렵습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이들을 마주할 때 항상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함께 느낍니다. 이들이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누군가의 손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믿지 않아 나는 혼자라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정말 혼자이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믿습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불신, 애착과 허무함을 줄 타듯이 오가는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 그들의 마음에도 누군가의 따뜻함과 위로가 전해지기를, 허무함과 불안이 조금이나마 꼭 줄어들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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