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첫 사건은 결혼 후 시가에서 처음 자게 되었던 일입니다. 결혼 전부터 종종 찾아뵈었고 밥도 먹고 일도 도와드렸습니다. 평소 저희 시어른들은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세요. 시모는 집안일을 하지 않으시고 주로 밖에서 사 먹거나 하십니다. 남편에게 처음 결혼하면 며느리들이 아침 차리지 않냐, 나는 뭘 만들까? 하고 물었더니 자기 부모님은 밥 안 해 먹으니 할 필요 없다고 하기에 정말 안 하고 쉬었습니다. 그랬더니 시모가 못 배워먹었다고 하시더군요... 밥 안 차린 게 저희 부모님을 욕 먹이는 짓이 되었습니다. 앞에서는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가만히 혼나고 있었고, 집에 가는 길 차 안에서 엉엉 울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제사입니다. 시가 어른들께선 제사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결혼하고 그동안 제사를 빠짐없이 참석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현재 저희는 맞벌이 상태라 월차를 쓰고 가기엔 무리가 있어 일찍 퇴근을 하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늦게 왔다고 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콕 집어 저에게 너는 월차 쓰고 와야 하고. 월차도 못 쓰는 회사라면 관두고서라도 해야 하는 너의 의무다. 하십니다. 남편은 늦게 와도 된다고요. 여기서도 앞에서는 아무 말 안 했습니다. 그냥 또 돌아가는 길에 엉엉 울었습니다.

세 번째 사건도 제사인데 코로나로 한참 심각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한창 대구가 심한 상황이었고, 제가 근무하던 직장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하며 대구경북지역 방문자는 격리하겠다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시댁이 대구경북지역라 그런 상황이다 보니 회사를 관둘 수는 없고 제사에 가지 못할 것 같다며 설명드렸더니 노발대발하셨습니다. 회사에 말하지 말고 몰래 오면 되는 거 아니냐. 여기 사람들이 무슨 죽을병이라도 걸렸냐고요. 여기서도 전화로 계속 죄송하다 사과드렸습니다. 그러고 나면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안부 인사차 전화를 드린 날이었습니다(매주 연락드립니다.). 식사는 하셨는지 간단한 안부 인사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너희는 내려오면 좀 혼나야겠다 하십니다. 그래서 뭐 때문에 그러시냐 여쭈니 제사 안 왔기 때문에 혼나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여기서 폭발해버렸습니다. 더 이상 감정적으로 제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련의 사건들로 정신적으로 힘들어져 줄곧 병원도 다녔었는데 그나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른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한테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그때 분명 상황 설명드렸고 하라는 대로 집에서 간단하게 제사를 지냈었다. 남편 따라 연고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일자리 구해서 열심히 내조하면서 살아왔는데 그렇게 살면 인정해주실 줄 알았는데 제가 가서 석고대죄라도 해야 하냐고요. 그랬더니 말대꾸한다고 소리치십니다. 그때쯤 되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 들리고 그냥 계속 울었습니다.

일주일 후 전화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소리 지르지는 않으시지만 어쨌든 제가 다 잘못된 거라고 하십니다. 말대꾸한 건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조금의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제 잘못이라 말하는 시부모가 밉습니다. 이젠 마주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과하러 내려오라는 날엔 병원에서 너무 힘들면 먹으라던 비상약을 세 알이나 먹었습니다. 이젠 다 지칩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자연스레 남편과도 자주 싸우게 됩니다.. 다 제가 잘못한 거 같고 저만 없어지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습니다. 시가만 생각하면 죽고 싶습니다..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의학신문입니다.

시댁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시군요.

고부간의 갈등은 예로부터 끊이지 않는 골칫거리이자 대를 이어 지속되는 고통의 근원입니다. 어쩌면 현대의 가족관계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부터 인류가 오랫동안 가져오며 해결하지 못한 숙제인 것 같기도 합니다.

고부갈등에는 너무도 다양한 원인과 역동이 있겠지만, 시댁을 대하는 며느리 입장에서의 어려움만 따로 떼어놓고 분석해보자면 공통된 구조를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훈육하는 부모] [처벌하는 부모]의 이미지로 다가오기 쉽다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부모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대상이자, 앞으로 모든 관계의 원형을 제공해주는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빚어낸 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누구를 만나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부모에게서 비롯한 이미지들을 투영합니다. 그것이 좋은 이미지이건 나쁜 이미지이건 관계없이 말입니다.

부모가 빚어내는 대인상(對人狀,) 이미지들은 무척 다양합니다. 나를 보듬어주고 사랑해주는 존재 [사랑하는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나를 보호해주고 위험을 막아주는 존재 [지켜주는 부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먹을 것을 주는 [먹여주는 부모]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행동을 제한하고 혼내는 [훈육하는 부모] [처벌하는 부모]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사람 간의 관계에서 느끼는 사랑, 슬픔, 분노, 불안과 같은 기초적인 감정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부모를 사랑하기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며, 부모를 미워하기에 누군가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어머니와 아버지 그 당사자를 향한 감정은 무척 복잡하게 중첩되게 되게 마련입니다. 누구나 부모를 사랑하지만 부모를 두려워하고, 부모를 좋아하지만 부모를 미워하게 되는 근본적인 까닭입니다.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는 시부모라는 애매한 존재를 만나면서부터입니다. 결혼과 함께 갑자기 나의 법적, 사회적 새엄마 새아빠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름부터가 부, 모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가지고 있던 부모 자식 관계에서의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애 초기부터 부모와 맺어왔던 이미지들이 새로운 부모를 향해 덧씌워지게 됩니다.

동시에 시부모는 낯선 어른들입니다. 남편은 내가 가족으로 함께하길 결정한 존재이지만 그의 부모는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선택한 사람들도 아니거니와, 나와 함께한 시간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부모는 부모입니다. 사회는 시부모를 부모로 받아들이기를 강요합니다. 부모처럼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결국 부모인 동시에 낯선 존재, 시부모는 [훈육하는 부모] [처벌하는 부모]와 같은 부정적인 부모상(狀)으로만 덧씌워지기 십상입니다. 시부모가 나를 비난하거나 제한하려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모를 두려워하듯 두려워하고, 부모에게 분노하듯 분노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부모를 두려워하고 미워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부모를 사랑합니다. 아주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기 때문이며, 나의 모든 내면을 빚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부모는 그렇게 애틋하게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분노와 사랑을 함께 감싸안기에 시부모는 내게 너무나 먼 존재입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부모의 이미지 중, 나를 처벌하는 부모, 나를 훈육하는 부모로서의 모습만이 뚝 떨어져 나와 드러날 따름입니다. 그것을 상쇄할 [사랑과 보호의 부모]는 아직 찾기가 어렵습니다. 홀로 남은 두려움과 분노의 이미지만이 더욱 증폭될 따름입니다.

우리는 시부모를 보며 마치 부모를 두려워하듯 두려워하고, 부모를 미워하듯 미워하곤 합니다. 나를 타박하고 혼내는 시부모 앞에 서면, 마치 부모에게 꾸중을 듣는 어린아이처럼 움츠러들게 됩니다. 강요하는 시부모 앞에 서면, 마치 부모를 미워하던 중학생처럼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과 분노는 쉽사리 갈무리되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도 아니면서!", "우리 엄마 아빠도 나한테 이렇게 안 하는데!"와 같은 생각들로 더욱 커져가기만 합니다. 그 두려움과 분노를 억누를 무언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시부모는 부모가 아닙니다. 어린아이 때처럼 나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는 부모가 아닙니다. 나의 경제적, 신체적, 심리적 안전을 완전히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절대자로서의 그 부모가 아닙니다.

따라서 시부모를 그렇게 두려워해야 할 필요도, 시부모를 그렇게 어려워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부모의 비난은 어린 시절 나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던 부모의 비난과 다릅니다. 나를 낳고 길러주는 부모에게 부정당한다는 상처와, 시부모에게 부정당한다는 상처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부모의 비난에, 시부모의 분노에 마치 부모에게 부정당한 것처럼 상처 받고 분노합니다. 마치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괴로워합니다.

어쩌면 시부모는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 내가 시부모의 반응에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부터가 고부갈등을 대하는 첫걸음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걸 떠나 나를 존중하지 않는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굳이 시부모와 며느리의 관계, 부모 자식 간의 관계 같은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하지만 정신의학에서 목표하는 바는 세상 모든 일에서 평안을 찾고, 모든 괴로움을 날려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생의 시련에서 충분히 괴로워할 만큼만 괴로워하고, 힘들어할 만큼만 힘들어하고자 하는 것이 건강한 정신을 위한 목표입니다.

 

질문자님께서 "다 제가 잘못한 것 같고 저만 없어지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점을 보면 어쩌면 질문자님도 시부모의 질책에 과도하게 두려워하고 과도하게 분노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과도한 분노는 때때로 갈 곳을 잃고 우리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스스로 파괴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나를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윗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만나게 됩니다. 그런 윗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버리는 것은 결코 적절하지 않습니다.

시부모와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부모의 태도를 고치는 것이 나의 노력으로 한계가 있다면, 시부모의 무례한 행위를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무너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필요하게 힘들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시부모는 부모가 아닙니다. 그 당연한 사실이 시부모의 행동에 더욱 화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당연한 사실을 망각한 나의 무의식이 나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쳐가는 나 스스로의 마음을 되돌아보기 위해 필요하다면 전문가와의 상담을 주저하시지 않길 권유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  *
 

정신의학신문 마인드허브에서 무료 마음건강검사를 받아보세요.
▶ 자세히보기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처럼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힘을 많이 얻습니다. 정성스런 상담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 자신에게 궁금했던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