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12>

[정신의학신문 :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일을 시작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 할 일을 생각하다가 문득 설거지 안 한 게 떠올랐다. 주방으로 가서 아침 먹고 난 그릇을 설거지했다. 이제 일해야지 마음먹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타서 책상으로 갔다. 지난주 미처 하지 못했던 빨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나가 세탁기를 돌렸다. 내친김에 손빨래도 몇 가지 했다. 베란다에 빨래를 다 널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점심때가 다 됐다. 이제 정말 일해야 해, 다짐하고 의자를 당겨서 앉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 미영이구나? 너무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진짜 밥 한번 먹어야 하는데…….”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와 지난 이야기를 풀어놓다 보니 한 시간 가까이 수다를 떨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책상 앞으로 갔다. 오후에 할 일을 생각하다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휴~ 나는 왜 이렇게 규칙적으로 일하지 못하고 자꾸만 뒤로 미루는 걸까?’

 

일을 미루는 게 습관이 된 자신이 한심스러운 내일해 님은 몇 달째 재택근무 중이다. 회사에 출근해서 일할 때도 그랬지만, 집에서 근무하면서 일을 미루는 버릇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회사에서 일하던 시절을 떠올려봤다. 그때도 다른 팀에 보내야 할 기획안 PPT 작업을 미리미리 해두지 않고 자꾸 미루다가 당일 오후에서야 부랴부랴 완성하느라 난리를 피웠던 기억이 났다. 일정을 정해 조금씩 업무를 처리해두면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내일해 님은 시간 있을 때 괜히 딴짓하다가 꼭 마감 시간이 임박해서야 일에 몰두하는 게 몸에 밴 사람이었다.

‘차근차근 일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니야, 그래도 결과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그녀는 미루는 습관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급한 일을 끝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스스로 자신을 다독이며 이렇게 위로했다. 뜻밖으로 일을 뒤로 미룸으로써 큰 사고가 난 경험은 아직 없었다. 일의 결과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사진_픽사베이

 

내일해 님처럼 자꾸만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경우다. 이런 사람들은 일을 완벽하게 해낸 것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 것으로 구분해서 평가한다. 흑백논리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아무리 최선을 다했다 해도 결과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다. 과정은 중요치 않다. 완벽한 결과만이 중요하다.

그렇다 보니 완벽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낸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 끝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비난한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기준치가 워낙 높아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결과가 번번이 만족스럽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잘했다고 칭찬하지만, 그런 말들이 오히려 자신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린다.

100점이 아니면 99점이나 90점이나 0점과 진배없다. 똑같은 실패일 뿐이다. 이렇게 매사 실패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비난을 하게 되면 뭔가 새로 일을 시작하기 어렵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일을 번번이 뒤로 미루게 된다. 
 

둘째는 목표만 있고 목적은 없는 경우다. 보다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 실행 가능한 세부적인 목표를 세워 실천해 나가는 게 일반적인데, 이들은 목적은 불분명하게 정해놓고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일에만 과도하게 집착한다. 예를 들면 다이어트를 하면서도 오로지 몸무게를 줄이는 데만 몰두하는 것이다. 이러면 금방 지쳐서 실패에 이를 확률이 높다.

다이어트를 통해 아름다운 몸매를 만들어 마음에 둔 사람에게 잘 보인다든지, 사진을 멋지게 찍어 이력서를 돋보이게 꾸며 꼭 취직에 성공한다든지 하는 목적을 가지면 의욕이 생길 텐데, 그런 건 없고 몸무게를 몇 킬로그램까지 줄이는 데만 온통 신경을 쓰면 점점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목적의식이 약하다 보니 의욕이 떨어져 일을 끈기 있게 하지 못하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지금 할 일을 나중으로 넘긴다. 

 

일을 계속 미루는 사람들이 일에 대한 태도를 바꾸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첫째는 자신의 일정을 세분화하는 것이다. 하루 동안 할 일을 시간 단위로 나눠서 짜보는 거다. 이렇게 촘촘하게 일정을 관리하게 되면 혹여 일을 미루더라도 미루는 시간이 단축될 수 있다. 며칠씩 미루지 않고, 몇 시간 정도를 미룰 수 있게 된다면 성공적이다. 그리고 일정을 짤 때 업무의 난이도와 중요도를 고려해서 어려운 일과 중요한 일을 먼저 하도록 하면 또다시 미루게 되더라도 일정에 큰 지장이 초래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에 따라 쉽고 가벼운 일을 먼저 하고, 어렵고 중대한 일은 나중에 하는 사람이 있고, 그 반대인 경우가 있다.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 할 수 없으므로 자기 스타일에 맞게 하면 된다. 다만 부담을 좀 덜기 위해서는 쉽고 가벼운 업무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수 있다.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일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적절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일정대로 일이 처리되었을 경우, 미루지 않고 일을 무사히 해낸 자신에게 상을 주는 게 좋다. 그날 저녁은 치맥 파티를 한다든지, 일하느라 보지 못한 재미있는 유튜브 영상을 본다든지, 사고 싶었던 물건을 산다든지 하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기는 하지만, 보상으로 인한 기대감이 생긴다면 미루지 않고 제때 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는 능동적으로 미루기(active procrastination)다. 이왕 미룬다면 회피를 위해 미루는 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미루는 것이다. 일을 미루는 것에 대해 비적응적이고 미성숙한 대처라고 이해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최근에는 미루기를 능동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경우 오히려 효율적인 대처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대반전인 셈이다.

 

능동적으로 미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 

1. 내 업무 능력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일을 해내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언제 내 업무 능력이 최대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2.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최선을 다한 결과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했다면 더 잘했을 텐데 하는 후회는 바람직스럽지 않다.

3. 미뤄둔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 일을 미뤄둔 시간 동안(예를 들어 오전에는 미뤄두고, 오후부터 일을 시작한다면 오전 시간 동안) 미룬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알차게 보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업무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주어진 일을 미뤄둔 시간 후에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결국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의지가 능동적으로 미루기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격언을 들으며 교육을 받았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남긴 명언이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아니면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시달리지 말고 과감하게 내일로 미루는 게 현명하다. 나를 고되고 힘든 상황으로 자꾸 몰아넣는 게 옳은 건 아니다. 때로는 한 번쯤 쉬었다 가는 것, 잠깐 미뤄뒀다 하는 것이 나를 더 사랑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능동적으로 미루기는 자기 태만이 아니라 또 다른 자기 사랑이다.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공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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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민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나를 지키는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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