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13>

[정신의학신문 :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고 부장은 회사 안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워낙 일을 잘하고 실적이 좋아 입사 동기 중에서 승진이 제일 빠르다. 동기들은 대부분 과장이고 차장이 몇 명 있는데 혼자서 부장이 되었다. 성취욕이 강하고 추진력도 대단하다. 향후 최고위급 임원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회사에서도 비중 있는 일이 생기면 그에게 맡길 정도로 신임이 상당하다.

하지만 부하직원들에게 그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눈높이가 지나치게 높고 완벽주의를 추구하다 보니 그의 마음에 들게 일을 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시킨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몇 번 야단을 맞고 눈밖에 나면 이를 만회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고 부장에게 찍혀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참지 못해 결국은 사표를 쓰고 회사를 떠났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고 부장 부서에서 일하는 나억울 님 역시 사회생활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라 일을 빈틈없이 잘하는 데다 대인관계도 좋아서 누구한테 미움이나 원망을 받아 본 적이 없을 정도다. 고 부장 성격과 스타일을 익히 알고 있는 그는 매사에 더 조심하고 눈치를 살펴 가며 그럭저럭 잘 지내왔다. 업무 관계로 지적을 당한 일도 없고 꾸지람을 들은 일도 없다. 

그런데 지난달부터 갑자기 고 부장의 태도가 달라졌다. 인사를 해도 못 본 척 그냥 지나치고 불러서 업무를 지시하거나 일 진행 상황에 관해 묻는 일도 없어졌다. 예전에 나억울 님이 참석했던 고 부장이 주재하는 주례회의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안 들어와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난 뒤 고 부장이 강조했다는 중요한 전달사항도 다른 직원을 통해 전해 들었다. 

‘도대체 고 부장님이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눈 밖에 날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아차 싶었다. 지난달 고 부장이 시킨 일이 있었는데, 나억울 님은 시간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서 다른 일을 먼저 하고 지시받은 일은 그다음에 한 적이 있었다. 누가 봐도 타당한 판단이었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 두 가지 일 다 잘 처리되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런 게 아니었다. 고 부장은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낀 모양이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다음날부터 나억울 님은 회사에 출근하는 게 무서워졌다. 어떻게 해야 예전처럼 회사생활을 할 수 있을지, 고 부장과의 관계가 이전처럼 회복될 수 있을지 궁리를 거듭했으나 막막하기만 했다.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해볼까?’

‘아냐, 무조건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지.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냐고 여쭤볼까?’

명랑하고 쾌활했던 나억울 님은 회사 안에서 갈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의기소침해져만 갔다. 

 

사진_픽사베이

 

나억울 님에 대한 고 부장의 이 같은 의도적인 침묵을 ‘silent treatmemt’라고 한다. 사전적 의미는 경멸, 반대, 거절 등을 나타내는 ‘묵살’ 혹은 ‘무시’를 말한다. 직접 화를 내거나 대놓고 따지기라도 하면 속이 후련할 텐데, 말을 안 하고 피하면서 없는 사람 취급하니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더 기분이 나쁘고 골치가 아프다. 그렇다고 왜 그러냐면서 싸우자는 식으로 덤벼들 수도 없다.

의도적인 침묵에 속수무책 당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심리적 증상이 따라온다. 

첫째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심한 무기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를 계속 찾으면서 마치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을 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나억울 님 같은 경우, 고 부장의 맺힌 감정을 풀어주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눈치를 살피면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다행히 노력의 대가로 고 부장의 마음이 풀려 관계가 회복된다면 안도감을 느낀 후 다시는 이런 상황이 재현되지 않도록 더 애를 쓰면서 눈치를 보기에 이른다. 의도적인 침묵을 행사한 사람에게 당한 사람이 점점 예속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다. 

 

이렇게 의도적인 침묵을 행사하는 사람의 심리적 상태는 어떨까? 

이러한 침묵에는 상대방을 더욱 강하게 통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침묵을 통해 무언의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자신이 상대방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존중하거나 정상적 의사소통을 중시한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어떤 사람이 이 같은 행동을 하는 걸까?

이처럼 미성숙한 행동을 통해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은 주로 나르시시스트들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빠진 사람을 일컫는다.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외모나 능력 등을 과신해 자기 자신이 뛰어나다고 믿거나 매사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정신분석학 용어다. 이들은 남보다 잘하는 점이 있으면 지나친 과시에 빠지고, 남보다 뒤처진 점이 있으면 심각한 자기비하에 빠진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거나 배려하는 마음이 없기에 협동이나 팀워크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이들에게 타인은 단지 자신의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나르시시스트 상사로부터 의도적인 침묵을 당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첫째, 내가 잘못한 걸 찾아내려고 나의 내부요인에만 집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나에게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건 나의 외부요인, 즉 상대방에게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문제를 발견하기 위해 나에게만 집중하면 자책이나 우울감에 빠질 수 있다.

둘째, 제삼자에게 평가를 받아보는 것도 좋다. 과연 내 잘못인지 상대방 잘못인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위 사례에서 과거 고 부장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직원들이 있다는 것만 봐도 나억울 님에게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 고 부장에게 원인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렇다 하더라도 의도적인 침묵을 행사하는 상사를 바꿀 수는 없다. 그의 성격을 개조한다거나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거나 그를 다른 부서로 옮기도록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바꿀 수 없다면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대할 수밖에 없다.

넷째,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선물을 사준다거나 무턱대고 용서를 구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다. 이럴 경우, 두 사람의 수직관계는 더 강화된다. 이후로는 더 작은 일에도 공격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의 감정을 풀어주는 게 내 업무가 아니다. 그의 남은 감정은 그가 풀어야 할 과제다.

다섯째, 내 감정을 살피고 어루만져줘야 한다. 상사의 감정에 집중하느라 자신의 감정에는 신경 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인을 내게서 찾으며 타인의 감정을 살필 게 아니라 원인이 타인에게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내 감정을 보살피는 게 우선이다. 상처 받은 건 그가 아니라 나다. 

 

고 부장 같은 나르시시스트는 어느 직장에나 있다. 그렇지만 의도적인 침묵으로 나를 괴롭히는 상사가 모두 나르시시스트인 것은 아니다. 나에게 집중하면서 흔들림 없이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기회가 되면 동료들끼리 술 한잔 마시면서 나르시시스트 상사 욕을 실컷 하는 것도 스트레스를 푸는 좋은 방법이다. 그가 나를 무시한다면 나도 그를 무시하겠다는 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미움받지 않고 오히려 인정받는 사람은 착취 관계에 익숙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람이 많다. 이는 정상이 아니다. 노예가 되려고 회사에 들어간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미움받는 자신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최대한 사적인 대화는 피하면서 업무로만 대해야 한다. 그가 우월감을 느끼게끔 칭송 같은 걸 하면 안 된다. 그를 위해 일하지 말라. 회사는 나를 위해 다니는 것이고, 일 역시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공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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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민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나를 지키는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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