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록의 [마음속 우물 하나] (5)

[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최강록 전문의] 

 

젊은 사람은 꿈을 먹고 살고, 나이 든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 이분법적으로 모두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이 그렇다. 평화와 안정이 이어지는 세상이라면 많은 사람이 이 말에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불안하고 어지러운 세상이라면 어떨까?

경제가 계속 하강 곡선이고, 취업난이 심각한 데다 미증유의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젊은이들이 꿈을 잃고 있다. 미래가 불투명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하소연한다. 빛도 보이지 않는 터널 안에서 터벅터벅 하루하루 걷고 있지만, 언제 끝이 보일지 어디가 출구인지 알 수 없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점차 무기력해지고 있다.

미국심리학회(APA)가 ‘2020년 미국의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온라인 설문 조사를 시행한 결과를 발표했다. 코로나 사태가 국민에게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지를 측정하기 위함이었다. 결과는 10대와 20대가 받은 심리적 충격이 가장 크고, 이보다 높은 연령대에서는 심리적 충격 지수가 낮았다. 심리적 충격의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으로는 우울증 증세가 적용됐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조사를 한 결과 역시 코로나로 인한 행복 감소 폭이 젊은 층에서 높고, 50대 이상의 경우 변화가 거의 없거나 변화 폭이 작다는 발표가 있었다.

 

악화한 경제 상황의 여파가 자영업자들이 다수 포함된 장년과 노년층을 비껴가지 않았음에도, 코로나로 인한 스트레스가 젊은 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힘든 세월을 살아온 경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유 중 하나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추억일 것이다. 추억은 고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이들은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추억,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추억,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했던 추억, 심지어 고통스럽던 과거의 기억까지 모두 현재의 고달픔을 잊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으로 삼아 언젠가 좋은 세상이 다시 올 거라 믿으며 묵묵히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사진_픽셀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추억은 어째서 늘 아름답게만 기억되는 것일까? 내가 아름다웠다고 추억하는 그때의 기억이 정말 사실에 입각한 기억일까? 그저 지난 일이니 다 괜찮았던 거라고 위안하며 좋게 포장한 기억은 아닐까? 내가 아름답다고 재구성해서 간직한 추억만 떠올릴 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은 일부러 다 잊은 척 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내 추억은 왜곡된 추억 아닐까?

 

자기의 소망과 기대에 맞게끔 과거의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왜곡하는 것을 ‘회상 조작(retrospective falsification)’ 또는 ‘추억 왜곡’이라고 한다. 망상형 정신분열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자신의 망상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과거 경험에 잘못된 사항을 첨가하기도 한다.

우울증 환자 중 일부는 자신의 불행과 그 불행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걱정하면서 지나치게 자기 자신과 본인의 처지에 몰입한다. 과거를 떠올리며 자책하는 마음이 차오른다. 이런 과도한 반추와 몰두로 인해 생각이 단순해지고, 본인의 생각을 의식적으로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지금까지의 생각이 새로운 반추로 바뀜으로써 또 다른 자기 집착을 초래한다. 이들은 즐거웠던 과거를 떠올리지 못한다. 따라서 회상 조작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미화시키고 이렇게 왜곡된 과거를 자신의 실제 인생인 것처럼 믿고 이야기한다.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또는 아예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 개인도 그렇고 집단도 그렇다. 그러나 괴로운 기억일수록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왜곡이 생긴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날마다 심한 구타를 당했다거나 가까운 친인척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거나 불량한 친구들에게 잘못 걸려 장기간 학대를 당했다거나 하는 경우, 이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쉽지가 않다. 그럴수록 기억은 더욱 또렷하게 재생된다. 이럴 때 아예 기억을 바꿔서 입력하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엄청나게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어, 나는 친인척들이 전부 교양이 넘치는 사람들이라 행복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어, 나는 학교 다닐 때 불량한 아이들과 싸워서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위기에서 구해주었어,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는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자기방어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어적 차원에서 회상 조작을 하는 게 아니라 중대한 잘못이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과거를 미화하거나 왜곡하는 사례가 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전혀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많이 들어본 말이다. 국회에서 열리는 각종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들이나 인사청문회 대상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했던 답변이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

그러다가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저런 것까지 자세하게 기억할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상세히 답변하는 걸 보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다.

간혹 뉴스에서 보듯 일본 우익 인사들과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를 보면 어이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자신들이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엄청난 만행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에 없다는 듯한 자세를 보이면서도 적반하장으로 있었던 역사를 태연하게 왜곡하기까지 한다.

“한국이 근대화된 것은 우리 일본이 한반도로 건너가 투자하면서 노력한 덕분이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을 것이다.”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역사를 조직적으로 분칠해버리는 ‘집단적 회상 조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 부정하고 싶은 과거를 무의식 중에 변경하면서 바뀐 기억을 옳다고 여기거나 우겨대는 정신질환이 곧 회상 조작이다.

 

사람의 기억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감정적이다.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겪고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기억하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도가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기억을 변경해 기억하면서 이를 옳다고 믿는다면 이는 정신적으로 치료 대상이다.

사람의 기억은 뇌에서 ‘해마’라고 하는 부분에서 맡는다. 이 해마는 기억뿐 아니라 감정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왜곡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격 장애나 신경증 같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에게는 증상이 과하게 나타날 수 있다. 뇌에서 충동을 조절하는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면서 충분히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동창회 모임에 나가면 술 한 잔 마신 뒤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때 너희들 밥 자주 사줬지. 그러느라고 돈이 모자라서 애 많이 먹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다수는 그 친구에게 밥을 얻어먹어 본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다.

“여학생들에게 내가 인기가 참 많았잖아?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학생이 한둘이었냐?”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본 친구가 이런 말을 하면 허풍인지 추억 왜곡인지 헷갈린다.

 

“나쁜 기억이라도 지울 수가 없단 말이지…… 대신 그 흔적을 지울 수가 있어.”

2005년에 개봉했던 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황정민에게 했던 대사다. 이 명장면의 대사처럼 기억은 지울 수는 없어도 흔적을 지워 내게 유리하거나 편리한 대로 왜곡할 수는 있다. 그런 다음 그것을 사실이라 굳게 믿고 자랑삼아 떠벌이기도 한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웠던 현실도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되면 일정 부분 아름답게 회상된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전쟁 때 생존을 위해 먹었던 꿀꿀이죽이나 가난했던 시절 어쩔 수 없이 먹었던 희멀건 수제비 같은 음식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먹는 이유도 음식을 먹기 위함이 아니라 추억을 먹기 위함이다. 고생스러웠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이 거기 있기에 자꾸 그리워지는 것이다.

 

가을은 추억에 젖기 좋은 계절이다. 빨갛게 물든 단풍과 샛노랗게 변한 은행잎이 수놓은 거리를 거니노라면 저절로 옛 추억에 잠긴다. 아련한 첫사랑이 생각나기도 하고,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때 단짝이던 친구가 보고 싶기도 하며, 나를 각별하게 챙겨주던 은사가 떠오르기도 한다. 아름다운 추억은 인생에서 보물창고 같은 존재다. 마르지 않는 화수분이다.

부부 사이에도 추억은 소중하다. 사랑은 뜨겁다가 싸늘하게 식기도 하지만, 켜켜이 쌓인 오랜 우정은 뜨겁지 않아도 차갑게 식지는 않는다. 사랑은 계산할 수 있으나 우정은 계산하지 않는다. 우정을 만드는 것이 바로 추억이다. 추억이 많은 부부는 설령 사랑이 식더라도 우정의 힘으로 서로를 배반하지 않는다. 젊었을 때 멋진 추억을 많이 만들어두는 게 좋다.

단 추억을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말고 진실 그대로 간직하려 노력하자. 과거를 무조건 폄훼하거나 자학하는 것도 금물이지만, 덮어놓고 아름다운 것으로 분칠하는 것도 옳지 않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 잘 간직해서 필요할 때 꺼내 보는 소박한 앨범 같은 추억을 만들자.

나태주 시인이 ‘추억’이라는 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처럼.
 

어디라 없이 문득
길 떠나고픈 마음이 있다.
누구라 없이 울컥
만나고픈 얼굴이 있다.

반드시 까닭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히 할 말이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푸른 풀밭이 자라서
가슴속에 붉은
꽃들이 피어서

간절히 머리 조아려
그걸 한사코
보여주고 싶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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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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