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정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Step by Step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물 흐르듯 연속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성숙의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인생은 한 단계씩 다리에 힘주어 올라가야 하는 계단식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계단은 그 모양과 높이가 제각각이지만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통적으로 겪어야 하는 시련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과업’이라고 부릅니다.  

 

과업은 시련입니다. 눈 앞의 계단이 높으면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고, 때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르기도 하죠. 물론 평생 못 오르고 그 자리에 머무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애써 올라갑니다. 왜냐고요? 산에서 높이 올라갈수록 더 넓고 다양한 시각에서 세상을 보고 새로운 기쁨을 느낄 수 있듯이 우리의 인생에서도 성숙할수록 더 넓은 시야로 삶을 즐길 수 있으니까요. 

사진_픽셀

 

중년의 과업

우리가 흔히 중년이라고 이야기하는 40세에서 60세 사이의 과업은 다른 세대의 과업과 조금 다릅니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인데요, 입시, 취업, 결혼, 퇴직 등 인생의 굵직한 이벤트들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정신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그동안 적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저 잔잔하게 넘어가는 시기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가통계포털에서 2016년 자료를 찾아보니 40세에서 60세 사이 중년의 10만 명 당 자살률은 약 30명 정도로, 10대나 20대보다도 높은 수치를 보였습니다. 사망 원인 별 사망자 조사에서 정신 및 행동장애(F01-F99)로 사망한 사람의 수도 청년에 비해 중년에서 더 높았어요. 그만큼 지금 우리나라의 중년은 정신건강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 중년의 과업은 무엇일까요? 동양에서는 40세를 불혹, 50세를 지천명이라 하여 세상에 현혹되지 않고 하늘의 뜻을 아는 시기라 하였고, 인간의 발달을 연구한 대표적 학자인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관대함(Generativity)을 성취하여 가족뿐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고 돕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년의 이상적인 목표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정도의 의미 차이는 있을지라도 양 쪽 다 중년에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 타인에게도 이로운 영향을 주는 것이 중요한 과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중년은 대개 ‘삶을 재평가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유년기, 청년기를 거치며 이루어 온 모든 것들을 돌아보고, 필요한 경우 어느 정도 경로 수정을 해가며 지금까지의 인생과 내가 원하는 모습의 미래를 연결해 나갑니다.

대개의 경우 이 시기에 직업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어 내고 전문성을 갖추어 안정적인 상태이지만,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체력은 떨어지며 여러 이상이 몸에 느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신체적으로는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직업, 가족, 대인관계에서의 안정이 이제는 몸소 느껴지는 노화와 만났을 때 중년은 고민하게 됩니다.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사진_픽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사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불혹’ 그 말처럼 흔들리지 않고 내 삶을 관철해 나가면 되니까요.

시련은 ‘아닌 거 같아’라는 답이 나올 때, 내 삶에 무언가 큰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질 때 모든 게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진짜 커다란 폭풍은 그 이후에 찾아옵니다. 바로, 현재의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변화를 줄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느껴질 때 위기는 찾아옵니다.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에서 낸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진심’에서도 비슷한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년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로 변화의 어려움을 꼽습니다. 직장, 대인관계, 가족 등.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현재가 아무리 불만족스럽다 해도 쌓아 놓은 것마저 무너뜨릴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기에 변화는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고민을 접어두고 그러려니 살아갑니다. 내 삶에 만족도가 떨어지는 건 가족과 직장을 지키기 위해선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요.

간혹 이러한 상황을 못 견디고 일탈을 하는 중년도 있습니다.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라고 불리는 이 상황은 주로 예고도 없이 돌발적이며 극단적이어서 가출을 한다 거나 과소비, 계획에 없던 퇴직을 하는 등 주위 사람들까지 고통을 겪게 합니다.  
 

사진_픽셀

 

더 나은 중년

2018년 현재의 기준에서 중년은 평균 수명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딱 절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긴 노년기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중년들의 고민은 더 커질 수밖에 없고, 그만큼 현명하게 중년의 고민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합니다. 

 

더 나은 중년을 보내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중년이 되면 가정, 직장 모두에서 책임감 있는 위치에 서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만큼 대화의 기회도 줄어든다고 해요. 현재의 고민에 대해 진솔하게 터놓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친밀감이 외로운 중년들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자기 효능감을 느끼는 것도 중요합니다. 중년에는 신체적 감퇴를 겪을 뿐 아니라 젊은 세대와의 잦은 접촉으로 인해 자존감, 자신감의 저하를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깨에 이고 있는 수많은 짐들 때문에 ‘나’를 위해 시간을 쓰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게 되죠. 좋은 남편, 멋진 아빠, 훌륭한 직장인이 되어가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는 잊어가게 됩니다.

이제는 가족이 좋아하는 것,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들을 찾아 자주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을 찾는 것이 ‘나’를 위해서 가장 중요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언제나 중년 세대입니다. 그렇기에 사회는 중년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책임을 지우죠. 사회는 그들에게 능력을 요구하고 관대함도 바랍니다.

하지만 중년에 들어선다 해도 개개인은 결국 모두 한 명의 사람입니다. 나 자신이 즐겁고 행복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거죠. 중년도 주어진 환경에서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세대가 중년의 행복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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