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나만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 실제 상담 내용을 재가공하여 구성한 내용입니다. 내담자의 동의를 얻어 작성되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실제 상담과 비교해 설명을 많이 덧붙였습니다. 실제 상담의 흐름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점 미리 밝힙니다.)

 

제가 100여 분과 무료 상담을 진행을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소망이 기저에 깔려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 소망은 ‘나만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상기와 같은 소망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소망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상기 소망을 가지고 계신 많은 분들의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혹은 다른 주 양육자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객관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으로는 충분한 care’가 되어졌다고 하더라도 내담자가 거기서 결핍을 느꼈다면 그것도 그냥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한 주관적인 결핍이 많은 분들에게 공통적으로 느껴졌었습니다.

‘과거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라는 제 연재의 주제를 고려해보았을 때 분명 의미가 있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우리가 ‘나만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라는 바람 안에는 어렸을 때 주 양육자로부터 받지 못했던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이 숨어있는 게 아닐까요? 어렸을 때 그 결핍과 관련된 상처가 컸다면 더더욱이요. 여기 28살 여성 내담자의 사연을 통해 이 욕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내담자: 저의 대인관계 패턴이 있는 거 같아요. 저는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 끌리지가 않고요. 저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끌리는 거 같아요. 저를 싫어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 떠나지를 못 하겠어요. 그 사람이 없으면 혼자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는 게 스트레스고, 항상 약자가 될 수밖에 없지만, 혼자가 된다는 게 더 무서워서 그 사람을 떠날 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들이 그냥 저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저를 싫어하는 것 같은 신호가 보이면 공포감이 들어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준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머리로는 아는데, 제 마음이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TV 프로그램에서 그런 캐릭터의 인물이 보이면 미련해 보이고 그랬는데, 막상 제 자신이 어떻게 되지가 않는 거 같아요.

제가 호감을 갖는 남성들도 패턴이 비슷한 거 같아요. 저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남자들에게 저는 오히려 매력을 느끼거든요. 저한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은 뭔가 없어 보이고 못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보니까 연애도 제대로 못하게 되는 거 같아요. 어쩌다가 제가 좋아하는 이성이랑 사귀게 되더라도, 시간이 지나서 그 사람이 나를 많이 좋아한다는 느낌이 들면 이내 제 마음이 돌아서게 되는 거 같아요.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사진_픽사베이


내담자는 자신에게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라는 욕구가 있는 거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 더 눈길이 가고 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스스로가 힘들다는 걸 앎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고 있는지를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내담자는 왜 스스로 힘든 길을 선택하고 있는 걸까요? 면담이 깊어지면서 이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내담자: 사실 제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니에요. 어렸을 때는 몰랐었죠.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이혼을 하시고 재혼하셔서 지금의 어머니를 만나셨어요. 제가 정말 갓난아기 때 이혼을 하셔서 저는 친어머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해요. 지금도 그렇고요. 아버지는 제 친어머니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하지 않으세요. 예전에 이야기 한 번 꺼냈다가 친어머니에 대한 욕만 엄청 하시더라고요.

제게는 5살 터울의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배다른 동생이에요. 남동생에게는 지금의 어머니가 친어머니예요. 어렸을 때는 이런 관계를 전혀 몰랐어요. 그냥 ‘엄마가 왜 나를 좋아하지 않지?’, ‘왜 엄마는 남동생 편만 들어주는 거지?’라는 생각만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얻기 위해 부단히 애쓰면서 살아왔던 거 같아요. 공부를 잘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요. 성적이 엄청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생보다는 잘했거든요. 그래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나는 원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까 어렸을 때 엄마한테 사랑받기 위해서 애썼던 기억이 많은 거 같네요. 사실 엄마보다 아빠가 저를 더 예뻐해 주셨는데, 저는 아빠보다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더 노력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런 노력들이 별로 다 소용이 없었어요. 좌절만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애썼던 공부들도 더 안 하게 되고, 성적도 떨어지고, ‘역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야.’라는 생각이 더 강해졌던 거 같아요.

 

내담자 분이 어렸을 때 가족 관계에서 보였던 패턴이 있었습니다. 나를 예뻐해주는 아빠보다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썼던 그 마음. 어째 내담자의 현재 대인관계 패턴과 닮아 보이지는 않나요?

내담자는 현재도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든 나를 좋아하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입니다. 상담 과정 중에 이러한 내용을 내담자 분에게 돌려드렸습니다. 내담자 분은 놀라시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닮아 있는 게 신기하고 놀랍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어지는 연재에서 계속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형성된 심리 기제가 나도 모르게 반복 작동되고 있다.’는 그 사실 말이지요. 이 내담자 분도 예외일 수 없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분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구체적인 내용과 정도가 다를 뿐이지요. 내담자가 대인관계에서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 애를 쓰고 있는 그 모습은, 어렸을 때 엄마로부터 받고 싶었던 애정을 갈망하는 욕망이 덧칠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그런 패턴들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힘써 해결해주어야 할 포인트는 무엇일까요? 현재에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더 에너지를 쓰자.’라는 노력을 기울이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아무리 노력해봤자 되지 않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해결되지 않는 결핍(hunger)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결해주어야 할 것은 그 결핍입니다. 어렸을 때 힘겨워했을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그 마음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보듬어 주는 그 일입니다. 그게 된다면 그 결핍에서 자유로워지고, 내 마음이 here & now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10번째 연재에서 말씀드렸던 ‘굿 윌 헌팅’의 윌이 했던 과정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윌은 그냥 힘들었던 내 과거의 마음(죄책감)과 마주해주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나니 여자 친구와의 진정한 사랑을 위해 떠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MIT에서 교수 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고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안에 있는 마음, 더더군다나 숨겨져 있는 내 상처를 꺼내고 마주하고 보듬어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담자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려 애쓰는 그 마음은 온전히 here & now의 마음이 아닙니다. there & then 즉, 어렸을 때 엄마의 마음을 돌리려 애쓰는 그 마음이 그대로 반복 작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there & then의 마음을 마주하고 보듬어주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약관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진_픽셀


글 서두에 ‘나만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라는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위 내담자의 경우는 상처가 컸기 때문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처가 그렇게 크지 않아도 그런 욕망이 생길까요?’라는 의문이 생기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제 글을 관통하고 있는 진화심리학적 사고방식을 다시 한번 적용해볼까요?

수백만 년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수백만 년 전에는 작은 부족을 이루고, 법 같은 제도도 없었습니다. 무주공산에서 집단 속에서 지켜야 할 규율들이 생기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규율들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결국은 내 편을 많이 만든 사람들의 의견이 강해지고, 그 의견이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과거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이 원칙은 사실 지금도 동일하기는 합니다. 페어차일드 전세기가 안데스 산맥에 추락해서 생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 다가오리라 생각하지만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하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고, 내 의견에 동조해줬으면 좋겠고 이런 욕망은 진화적으로 뿌리 깊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런 욕망을 가지지 못한 선조들은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지금 우리 중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진화적으로도 ‘나만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라는 욕망은 매우 유의미합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말이 될 테고요. 그리고 좀 더 가까운 과거인 신생아의 마음으로 돌아가 봐도 ‘나만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라는 욕망은 원초적인 것입니다. 신생아는 나를 좋아해 주는 성인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애초에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과학을 공부하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자연은 인간의 행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더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게 먼 과거에서 형성된 것들은 인간의 힘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건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그렇구나. 나만 이 문제로 힘들어하는 게 아니구나.’라고요.

그런데 위 내담자처럼 가까운 과거에서 형성된 마음들은 우리가 바꾸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오롯이 마주하는 방법으로써 가능합니다. 제 연재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이 그러한 것들이고요. 내가 남들보다 ‘나만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라는 욕망이 심한 편이라면 위 내담자처럼 분명 어렸을 때 맞닿아 있는 상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찾고 보듬어주신다면, ‘나만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라는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못하겠지만(완전히 자유로워져도 문제가 있긴 합니다. 혼자 살아야죠.), 남들만큼, 그리고 견딜 수 있을 만큼은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진짜 내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도 찾아가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본 글은 이일준 정신과 전문의가 Transmind 마음변화 연구소에서 무료 상담했던 내용을 각색한 글입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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