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 x 힙합 저널리스트 연재

[정신의학신문 :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미국 힙합에는 있고 한국 힙합에는 없는 두 가지는 무엇일까? 하나는 게토(ghetto)이고 다른 하나는 Nigga(이하 Ni**a로 표기)를 비롯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언어인 N-word라고 할 수 있다. 게토는 ‘사회, 경제적으로 방치되어 있는 소수 인종, 민족이 집단을 이루며 사는 도시의 빈민가’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다. 보통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이 다수 거주하는 도시 내에 만들어진 공공주택단지를 일컫는 경우가 많으며, 대개 높은 범죄율과 가난에 시달린다. Ni**a는 ’Black'을 뜻하는 라틴어 ‘Niger’와 스페인어 ‘Negro에서 파생되었다. 이 단어는 노예제도 시절부터 아프리카 혈통의 흑인을 모욕하는 용도로 사용돼 왔다. 하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동질감 혹은 친밀감을 표시하는 언어로 사용되며, 나아가 자긍심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넓게 보면 게토와 N-word 모두 400년 전부터 북미 대륙에 존재했던 흑인과 백인 사이의 기울어진 운동장인 흑인 노예 제도에 뿌리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400년에 걸친 차별, 폭력의 역사는 흑인들 서로를 형제, 자매(brothers and sisters)라고 부를 수 있는 민족 공동체로 묶어주었다.
 

사진_픽사베이


결국 이 두 단어는 ‘공동체’라는 한 단어로 귀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이름은 공동체입니다>에서 저자 장성익은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물리적 공간, 곧 지리적 영역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상호작용, 즉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뜻한다. 세 번째는 그렇게 관계 맺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집단의식으로서 공통의 연대이다. 힙합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뉴욕 브롱크스라는 지역에서, 비폭력에 대한 암묵적인 연대 속에서, 음악을 통해 평화 안에서의 경쟁과 즐거움을 추구한 데서 출발한 문화가 힙합이다. 힙합은 그 탄생부터 지극히 공동체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마다 힙합은 함께 숨을 쉬어 왔다. “Stop the violence”와 같은 비폭력 운동, LA폭동, 허리케인 카트리나, “Rock the vote”, “Respect my vote”와 같은 선거참여 독려운동, 첫 흑인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최근까지도 미국 흑인 공동체를 뒤흔들고 있는 이슈는 #BlackLivesMatter(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해시태그 운동이다.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잉대응과 그로 인한 흑인의 사망 사고가 미국 사회에서 이어지고 있다. 2014년 18세의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이 퍼거슨 시에서 백인 경찰에 의해 사살되고, 43세의 흑인 남성 에릭 가너(Eric Garner)가 뉴욕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질식사 한 이후에 #BlackLivesMatter 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번졌다. 수치로 살펴보면, 미국에서 경찰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가 흑인이 백인에 비해 3배 이상 많고, 특히 비무장 상태에서 살해되는 경우는 흑인이 백인에 비해 5배 많다. 연간 300여 명의 흑인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는데, 그중 최소 4분의 1 이상은 무장하지 않은 피의자이다. 공권력에 의한 폭력은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과 정체성을 공유한 많은 이들의 정신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미국에서 이에 대한 국가 단위의 연구가 행해졌다. 보건의료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술지 중 하나인 란셋(Lancet)의 2018년 6월 호에 실린 펜실배니아 대학 벤카타라마니(Venkataramani) 교수팀의 연구 결과가 그것이다. 주요 결과는 '비무장 흑인에 대한 경찰의 살인이 한 건 증가함에 따라 조사 대상이 된 흑인 인구의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날이 0.14일 증가했다'였다. 연구팀의 추정에 의하면, 경찰의 비무장 흑인 사살이 유발한 흑인들의 정신건강 피해는 연간 약 5500만 일의 정신적 불건강 상태에 해당하며, 이는 당뇨병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인종 간 건강불평등 요인으로써 구조적 인종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렇게나 공동체에 큰 영향을 끼친 ‘경찰의 비무장 흑인 사살’에 대한 반대 캠페인인 #BlackLivesMatter 운동에 처음부터 힙합이 함께하진 않았다. 60, 70년대의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해온 아티스트들 – 니나 시몬, 커티스 메이필드, 제임스 브라운, 스티비 원더, 길 스콧-헤론, 마빈 게이, 펑카델릭 등 – 로부터 음악적 유산을 물려받았고, 자메이카를 넘어서서 지구촌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던 밥 말리의 레게를 이어받은 힙합이지만 #BlackLivesMatter 운동 초창기에는 힙합의 목소리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데릭 로즈와 르브론 제임스 같은 NBA 농구 선수들이 공식 경기 전 연습 시간에 “I Can’t Breathe(숨을 쉴 수 없어)”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해 먼저 비판했다. 결국 힙합계도 이 운동에 동참했다. 래퍼 J. Cole은 음원을 발표했고, Talib Kweli는 퍼거슨의 시위 현장에 함께했다. Jay Z와 Beyonce는 미국 곳곳의 시위 현장을 남몰래 지원했다. 결국 2015년 7월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인근에서 열린 시위에서 #BlackLivesMatter 운동과 힙합은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결합한다. 군중들은 큰 목소리로 반복해서 이 구호를 외쳤다. “We gon' be alright(우리는 괜찮을 거야)!" 이 시위 현장의 생생한 영상은 SNS를 통해 미국 전역에 확산되었고, 이후 수많은 #BlackLivesMatter 시위 현장에서 행진곡이 되었다. “We gon' be alright!" 이 구절은 래퍼 Kendrick Lamar의 노래 <Alright>의 후렴 구절이다.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상처 받고 쓰러져보기도 했다는 걸 모르는가, 형제여.
우리의 긍지가 바닥을 칠 때,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돼?”라고 물었지.
우린 경찰을 증오해. 그들은 확실히 거리에서 우릴 죽이려고 들어.
난 목사님의 집 앞에 서있어.
내 무릎은 약해지고, 총구는 불을 뿜으려고 해. 그래도 우린 괜찮을 거야.

 

이 가사는 확실히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을 꿈꾸었던 힙합의 시작과 닿아있다. 또한 현재 흑인들의 고난뿐 만이 아니라 400년 미국 흑인의 역사 전체를 관통한다. 미국 음악잡지 <롤링스톤>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BlackLivesMatter 운동은 상업주의에 젖어 행복에의 도취만을 이야기하던 21세기 힙합이 시대적 불의에 대한 제 목소리를 찾는 데 중요한 역동이 되었다”
 

사진_픽셀


한국 힙합으로 다시 눈길을 돌린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영대가 칼럼 <한국 힙합>에서 지적했듯이 게토를 기반에 두고 성장한 미국의 힙합과 달리 한국의 힙합은 가요계와 온라인 커뮤니티 두 축을 토대에 두고 성장했다. 게다가 한국의 힙합은 힙합의 원류처럼 60, 70년대의 가스펠, 소울, 레게와 같은 저항의식을 담은 선배 음악의 좋은 양분을 이어받지도 못했다. 그 시절이 서슬 퍼런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힙합은 취향 공동체 이상의 공동체적 성격을 갖지 못하고 출발했고 그 토대도 미약했다. 힙합이 그들만의 음악이었을 때에는 대중들은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하지만 힙합이 대세 음악 장르가 되면서 대중은 소위 랩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의 고액 수입에, 페미니즘 논란에, 최근의 ‘빚투’ 논란에 이르기까지… 안타까운 건 힙합에 대한 관심의 중심에 ‘힙합’ 자체는 빠져있다는 것이다. 마치 한국 힙합에서 공동체성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한국 힙합에 공동체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세월호, 국정농단에 대한 목소리를 내었고, 취약한 노동현장에 대한 고발을 지속적으로 해 온 제리케이 같은 아티스트도 있다. 하지만 짧은 민주화의 영향 때문인지 경쟁 일변도의 시대상 때문인지 제리케이의 이런 공동체적인 목소리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는 못하다. 

그렇다면 한국 힙합은 공동체성이 빠진 채로 상업주의의 길만을 가게 될 것인가? 혐오와 분노가 일상이 된 지금의 세상을 계속 외면해도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정신건강이야 말로 중요한 사회적 이슈 중 하나다. 2016년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신질환 실태 역학조사에 의하면 전국민 4명 중 한 명은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질환에 노출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우리나라의 자살율은 최근 14년 동안 1, 2위를 다툰다. 시대의 아픔과 공명하는 힙합이 필요한 때다. 내가 마음을 돕는 사람이기에 발생하는 편향 오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가능성을 자신의 마음의 고통을 전면에 내세운 아티스트 들에게서 찾는다. 우원재, 빈첸이 그들이다. 이들은 화만 내지 않는다. 자랑만 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약함을 꺼내어 놓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을 공감하게 만드는 지점일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공감받는다고 느끼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한국 힙합의 공동체 됨은 공감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짜와 가짜가 만나도 가짜가 둘이기를
각자와 각자가 살아도 철학이 꼭 중요하기를
이 밤과 저 밤이 달라도 우리는 정말 우리기를
이 도시의 별 없이 밝은 밤이 밝혀주는 게 이 밤이기를
 - 우원재 <또> -

 

엄마 아들은 자퇴생인데 옆방에 서울대 누나는 나를 보면 어떤 기분이신가요
동생이 못나 보이고 아들이 못나 보이고 어디서 얘기 꺼내기도 쪽팔리신가요
자퇴하지 않고 견딘 친구가 전교 몇 등을 했단 얘기들은 엄만 어떤 기분이신가요
애매한 표정으로 제게 그 얘기를 했던 엄마는 그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 빈첸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 -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나있다. 하지만 ‘화’라는 건 2차적인 감정이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절망, 슬픔, 좌절을 풀어내지 못한다면, 쌓여있는 감정들은 응집되어 나에 대한 분노가 되거나 너에 대한 분노로 변하여 우리들의 영혼을 좀먹는다. ‘화’ 이전에 우리의 마음을 풀어낼 공간이 필요하다. 치유자 정혜신이 자신의 저서 <당신이 옳다>에서 ‘공감의 외주화’라고 표현했듯이 공감의 공간으로 정신과 진료실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은 너와 나의 만남이 필요하다. 서로의 마음이 무엇인지 소통을 해야 한다. 소통의 수단이 모자란 지금의 한국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의 채널 중 하나가 힙합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모든 힙합이 공감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다양한 힙합의 여러 장르들과 내용들 가운데에서도 힙합을 가장 많이 수용하는 10, 20대의 심정을 공감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힙합이 어느 시대보다도 바로 지금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다. 

 

링크1: 란셋(Lancet)에 실린 벤카타라마니(Venkataramani) 교수팀 연구
https://www.youtube.com/watch?v=Z-48u_uWMHY

링크2: Kendrick Lamar <Alright> 뮤직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Z-48u_uWMHY

링크3: #BlackLivesMatter 시위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VUC_DOhfzwQ

링크4: 우원재 <또> (Feat. Tiger JK, Bizzy, MRSHLL) 음원
https://www.youtube.com/watch?v=vuScjZYirw4

링크5: 빈첸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 뮤직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nBx6myxGfAQ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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