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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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인 한류 확산과 함께 한국 드라마, K-pop, 한식 등이 인기를 끌며 해외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올라갔습니다. 삼성, LG, 현대와 같은 대기업의 인지도나 해외시장 점유율 역시 상당하고, 해외에 나갈 때면 중국 사람인지 혹은 일본 사람인지 묻곤 하던 외국인들이 이제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먼저 건네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국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면서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곤 합니다. 특히 한국전쟁부터 60~70년대 산업화 시기와 이후의 급격한 성장기를 지나온 세대라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는 느낌을 받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한국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동시에 우리에게 오랜 시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지표는 바로 OECD 자살률 1위, 우울증 발병률 1위 입니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단기간에 유례없이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이뤄 온 우리 사회에서, 유난히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정신건강 영역입니다.

천혜의 관광자원이나 광물,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축적된 경제적 자본 등이 전혀 부재했던 우리 사회에서 성장을 위한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인력’이었습니다. 한국인 특유의 근성과 부지런함, 빨리빨리 문화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쉴새 없이 달려왔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에서 잃어버린 것도 많습니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원래 살던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로 이주했고, 모두가 이웃이고 서로 숟가락 개수까지도 알고 지내던 마을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약화되었습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지내게 된 지 오래입니다. 일터에서는 높은 생산성 달성을 위해 높은 노동강도와 긴 근무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한국행정연구원의 <한국과 주요 선진국 노동시간 규제 현황 비교>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연간 실노동시간은 2021년 기준 1915시간으로 OECD 평균인 1716시간보다 199시간 더 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교육 분야에서는 높은 교육열과 함께 학벌에 따른 평가와 계급화로 지나친 대학입시 경쟁과 능력/성과 위주의 문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경제, 문화적으로는 많은 성장을 이루는 동안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어 상대적 박탈감과 기회의 불균형이라는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한창 유행처럼 번지던 ‘수저 계급론’은 이런 사회상에 대한 자조적 평가와 젊은 세대의 비관적 시각을 잘 보여줍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10대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희망과 꿈을 갖기를 포기하고 팍팍한 현실을 하루하루 버티는 데 급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출생률은 얼마 전 또다시 최저치를 경신해 0.7명을 기록했습니다. 나 하나도 살기 힘든 세상, 자녀를 낳고 기르기에는 너무 큰 위험 부담이 따른다는 것이겠지요. 

우울증과 자살에는 희망이 없는 느낌, 즉 무망감(hopelessness)이 매우 주요하게 작용합니다. 누구나, 어느 사회에서나 어려운 일은 발생하고 위기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희망이 있다는 사실,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기대감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반대로 무망감과 함께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무조감(helplessness)은 우울증과 자살 위험을 크게 증가시킵니다.

우리 사회에서 유독 우울증과 자살률이 높게 나타나는 데에는 이런 무망감과 무조감이 크게 자리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는 사회병리적 현상으로서 우리 사회의 경쟁적 분위기, 각자도생의 위기감과 불안감, 사회적 연결망의 부족, 가정과 공동체의 붕괴와 같은 문제들과도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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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전학, 신경과학, 사회과학, 정신건강 분야에서는 사회가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이 개별 구성원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의 합보다 크다는 결과를 보여주는 연구들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울증을 개인의 의지나 노력, 개인 차원에서의 치료에 관한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의 접근과 해결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울증은 낮은 삶의 질 및 만족도와 관련 있고 이는 개인이 처한 사회적, 환경적 맥락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삶의 질과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은 무기력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시스템의 문제 앞에서 거대한 벽에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좌절 경험이 반복, 누적될 때 희망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사회적 규범과 가치관, 윤리와 도덕 기준이 혼란할 때, 상식과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의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사회에 대한 실망과 공허, 무망감에 빠집니다. 우울증과 자살에 대한 사회적 개입이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지역사회 차원에서 우울증과 자살 고위험군을 조기에 발견하고 지속적으로 치료 및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행히 올해 정부에서는 2027년까지 인구 10만명당 자살 사망자 수 30% 감소를 목표로 우울증 등 정신건강 위험 신호를 빠르게 발견 및 치료할 수 있도록 정신건강 검진 주기를 10년에서 2년으로 단축하고 생명존중 안심마을을 조성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2023~2027)>을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울증과 자살예방을 위한 사회적 차원의 노력으로서 긍정적인 신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여전히 존재하는 정신질환 치료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변화시키고,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정신건강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관련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지속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합니다. 또, 정신건강이 심리적 영역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신체적 영역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사회경제적, 신체적 취약계층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건강뿐 아니라 사회복지, 의학, 도시생태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장기적으로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사회안전망 및 유대감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도 이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울증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울을 비롯한 정신건강 문제는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 환경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과 사회는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신건강 증진을 위해서는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의 역할과 제도적 지원이 중요합니다.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제도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울증에 관심을 갖고 치료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우울증 캠페인 바로가기: http://www.psychiatricnews.net/event/event5.html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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