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어릴 때 불안정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양육을 본인 컨디션이나 감정대로 하셔서 잘할 땐 이것저것 챙겨 주다가 화가 나면 심하게 매질을 하셨습니다. 옆집에서 애 죽는다고 뛰어온 적도 여러 번이었어요. 또 말로는 때때로 “저걸 내가 낳아서, 그냥 죽어라.”라는 식으로 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들을 하셨어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베란다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도 충동적으로 들었고요.

어릴 때부터 우울증이 있었고, 성인이 되면서 약을 먹었습니다. 우울증은 좋아졌지만 문제는 일상생활에서 수용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마음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수치심을 느끼고 화가 납니다. 

예를 들면, 직장 상사에게 긴 시간 동안 잔소리를 듣거나 혹은 어떤 식당이나 매장에 손님으로 갔을 때 저는 매너 있게 행동하고 대답하는데, 오히려 일하는 직원들이 불친절하거나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는 등 큰일이 아닐 때조차 무시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화가 많이 납니다. 상대방이 정말 저를 무시해서 그럴 수도, 그 사람 성격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지만, 당장 그 상황에서 감정을 조절하는 데 한참 걸려요. 어떻게 해야 일상생활에서 이런 불편함을 조금씩 덜어 낼 수 있을까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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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울러 사연자님의 개인적인 고민에 대해 용기 내어 상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연자님께서 유독 마음의 불편감과 심리적 고통을 유발하는 지점이, 상대방으로부터 무시당했다거나 수용받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인 것 같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직장 상사에게 긴 시간 동안 잔소리를 듣는다거나 매장에 들렀을 때 불친절한 직원의 태도에 수치심과 분노의 감정이 들고, 그 감정이 너무 강렬하다거나,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이렇게 사연을 신청해 주셨네요. 물론, 누구나 직장 상사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거나 매장 직원이 불친절한 상황에서는 기분이 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감정이 요동칠 만큼 불쾌하다거나 수치심이 건드려질 만큼 비극적인 상황도 아닐 텐데요, 이런 일들은 대부분 상대방에게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또 누구나 언제든 겪을 법한 일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격하게 감정이 요동치거나 내면의 깊은 수치심이 건드려진다면 생활하는 데 있어서 심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기가 힘들뿐더러 불편해지는 상황이 많을 거라 짐작됩니다.

사연자님께서 타인으로부터 수용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마음이 유독 힘들어지는 이유를 스스로 살펴보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 불안정한 어머니에게서 양육되면서 신체적·언어적 폭력에 시달렸던 경험이 떠오르신 듯합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일관적인 기준이나 정당한 사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어머니 자신의 감정 상태나 컨디션에 따라 언제 어머니가 보살핌과 애정 어린 태도를 보일지, 언제 가혹한 처벌과 신체적 폭력, 사연자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언어폭력을 가할지 예측할 수 없어, 오랫동안 공포감과 혼란감을 경험하며 지내 오셨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실제로, 보호자로부터 지속적으로 학대를 받으며 자란 아동은 공포와 관련된 감정을 처리하는 편도체(amygdala) 반응이 과잉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연자님의 어머니께서 예측할 수 없는 감정 변화를 자주 보여 왔고, 그에 따라 사연자님께서 신체적 및 언어적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면, 사연자님께서는 늘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어머니의 표정이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불안한 기운만 감지되어도 뒤이어 폭력이 가해질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렇게 편도체가 과잉 활성화되기 시작하면 상사가 비록 듣기 좋지 않은 소리지만 업무적으로 사연자님께 해야 할 말을 하는 상황에서도 마치 어머니에게 비난을 들었을 때 활성화되었던 편도체의 공포 반응이 자극되면서 내면의 깊은 수치심이 건드려지고 분노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죠.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피아제(Piaget)는 아동이 인지적으로 발달해 나가는 과정에서 외부의 정보나 경험을 통합하고 조직화하는 인지적 틀인 스키마(schema)가 형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새로운 경험을 기존의 스키마에 동화하거나 새로운 경험에 따라 기존의 스키마를 조절하는 과정을 거쳐서 스키마가 수정되거나 변화된다는 것인데요, 사연자님처럼 부모로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비난이나 폭력에 노출될 경우, 무의식적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수치심을 내면화함으로써 부정적인 자기 개념 및 무가치감의 스키마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타인의 부정적인 시선이나 평가에 더욱 민감해지고, 그러한 외부 자극에 의해 두려움과 수치심 및 분노 감정을 더 자주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감정을 인지적으로 이해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곱씹다 보면 다시 수치심이 자극되는 분노 반추의 악순환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성장하면서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들을 여러 번 들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때의 그런 말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견디기 힘드셨을까요. 이제는 성인이 되어 어머니가 사연자님께 했던 모진 말들이 어린 사연자님의 잘못이나 존재 가치와는 무관한, 어머니 스스로가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부정적 감정을 어린 사연자님께 투사한, 엄연한 아동 학대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연자님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상처가 상기되고 건드려질 때마다 과거의 아픔이 재현되는 것만 같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사연자님께서 타인에게 수용받지 못할 때 감정적으로 무척이나 힘들어지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양육 태도가 거부적인 부모에게서 양육된 아동의 경우, 거부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짐으로써 대인관계에서 예기 불안을 경험하거나, 성인이 된 후에도 타인으로부터 수용받기를 바라는 욕구가 과도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에게 수용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강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타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우선시하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돌보는 데는 소홀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기대했던 수용이 좌절되거나 거부당했다는 느낌이 들면 분노를 느끼게 되고요. 분노에 따른 공격성이 외부로 향하는 경우, 분노 폭발이나 폭력, 타인에 대한 비난 등으로 나타난다면, 내면을 향하는 경우 우울감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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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사연자님께서는 꽤 오랫동안 자신의 욕구나 감정에 초점을 맞추거나 표현하기보다 억누른 채로 타인의 욕구나 행동,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타인 지향적인 삶을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사연자님의 심리적 메커니즘 및 과거의 경험이 사연자님의 자기개념이나 부정적 감정 및 반응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물론, 이것을 인지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 내면에 대한 깊은 탐색과 이해를 통해, 그리고 억눌렸던 감정들을 편안한 대상이나 시간 속에서 자유스럽게 풀어내고, 느껴 보며, 어루만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욕구와 감정에 초점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능력도 기를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연자님을 진정 아껴 주는 분들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생각이나 욕구,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도 충분히 수용받아 보는 경험을 많이 가지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만약, 주변에 충분히 신뢰할 만하고 진솔하게 마음을 나눌 만한 분들이 별로 없으시다면, 전문 상담가와의 상담을 통해 안전한 환경에서 사연자님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충분히 수용받는 경험을 가져 보실 것을 권유드립니다.  

또한, 사연자님의 일상에서도 부정적인 자기개념 및 수치심과 분노로 연결되는 스키마가 인식될 때, 이에 대한 타당성에 도전하여 반박함으로써 긍정적인 자기개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꾸준히 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직장 상사에게 긴 시간 동안 잔소리를 듣는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분노’나 ‘수치심’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느껴 보면서, 한편으로 그 감정을 마음속에 꽉 채워 넣고 곱씹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느낀 후에는 흘려보내는 겁니다. 이렇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인정해 줄 때, 비록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그 감정이 억압되어 이후에 파괴적이거나 공격적인 힘을 발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감정을 충분히 느껴 보고, 이번에는 인지적으로 한번 이해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 직장 상사가 나에게 하는 것이 정말 쓸데없는 잔소리인지, 또는 업무적으로 필요한 내용인지, 내가 고쳐야 할 부분이 있는지 숙고해 본 후에 내가 느끼는 감정이 그 상황에서 과도한 건지, 적절한 건지 분별해 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연자님께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특정한 상황에 대해 그 즉시 숙고할 여유가 없다면, 하루 일과를 마치는 시간에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 느꼈던 감정, 생각, 대응하거나 반응했던 행동 등 각각이 어떻게 상호 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것이 나의 스키마나 자기개념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등등 이해해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해를 통해 타인의 평가나 비판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거나 수용할 부분이 있다면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런 것에 전혀 흔들리거나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자기 확신과 자기 존중의 스키마를 재정립해 나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연자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연자님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사연자님의 존재 가치를 함부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설령 사연자님의 부모라도 말이지요. 사연자님께서는 과거에 우울증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고 또 적극적으로 치료받을 만큼,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할 만한 내적 힘이 있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직면하신 마음의 어려움도 자신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과정을 통해 충분히 극복하고 단단해지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매일 아침, 그리고 잠들기 전에 사연자님 스스로에게 긍정의 말을 들려주세요.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좋아. 나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야.’

이렇게 스스로를 인정해 주고 수용해 주는 사연자님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서울역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희주 원장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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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살피려는 노력을 하기, 그리고 작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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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육을 키운다는 느낌으로 조금씩 실천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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