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인들의 힘든 기억 다루기

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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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마음이 유독 힘들었던 기억이 하나둘쯤 있으실 겁니다. 힘들었던 기억들이 많을수록, 또 그런 기억들이 불쑥불쑥 더 자주 떠오를수록, 안타깝게도 우리의 인생은 힘든 순간들로 더 많이 채워질 수밖에 없을 텐데요, 이럴 때 우리는 의도적으로 주의를 딴 데로 돌려서 그 기억을 환기하거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음악을 듣는 등 나름의 대처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렇다면 자폐를 가진 분들은 어떨까요? 이들은 자폐증의 특성상 유난히 감각이 예민하고, 이러한 민감한 감각 기관에 준하는 아주 놀라운 기억력을 자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보통 분들이라면 쉽게 잊어버릴 만한 일들도 세세히 기억하는 능력이, 이들을 오히려 힘들게도 합니다.

이들은 일상에서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해지거나 불편한 상황들을 자주 마주하게 되는데요, 그러다 보니 돌발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이 오해하는 상황도 종종 발생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부정적인 피드백에 노출되면서 이들에게는 부정적인 정서가 수반되는 안 좋은 기억들이 하나둘씩 플러스 되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게 되죠. 

더욱이 이미 그들에게 슬픔이나 고통, 괴로움이나 두려움, 외로움과 같이 부정적인 정서와 함께 저장된 기억은, 보통 사람들처럼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거나 당시의 상황을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때 느꼈던 강렬한 정서가 고스란히 각인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들은 당사자가 미처 예측하거나 자각하지 못한 사이, 기억과 함께 연합된 아주 사소한 단서나 유사한 감각 기억들이 자극되거나 촉발되면서 되살아납니다.

 

한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볼까요? 자폐증이 있는 열한 살 정민이는 일곱 살 때 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를 당한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정민이는 가족들과 함께 놀러간 공원에서 형이 태워 주던 자전거의 뒷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혼자서는 자전거를 타지 못했던 정민이지만 가끔씩 형이 자전거를 태워 주던 시간이 즐거웠던 터라 그날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탔습니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앞서 달려오던 노란색 오토바이가 정민이가 타고 있던 자전거를 향해 돌진했고, 형과 민준이는 그 자리에서 튕겨져 나갔죠.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정민이는 그날 이후로 노란색 오토바이만 보면 길길이 날뛰며 불안한 모습을 보입니다.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요. 또 가족들과 자주 갔던 동네 공원에도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정민이의 사례처럼 사고를 당할 만큼 충격적인 기억은 아닐지라도, 자폐증이 있는 분들이 일상에서 경험했던 불쾌하고, 불안했던 기억이 떠올라 힘들어하는 경우는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도 본인이 왜 그렇게 불안하고 힘든지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거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도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 난감해지기도 하죠.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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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그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할 때 잘 경청해 주고, 그가 느꼈을 부정적 감정과 괴로움에 공감해 주는 것입니다. 또 불편한 감정과 불안한 마음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과거의 기억으로 힘들어할 때 의외로 사람들은 “푹 자고 나면 나쁜 기억도 없어질 거야.”, “아직까지 그 일 때문에 괴로운 거니?”, “이제 그만 잊을 때도 됐잖니.”라는 식으로 마치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나 별일 아닌 것처럼 괴로워하는 당사자의 기억이나 감정을 무마 혹은 축소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런 접근 방식으로는 그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이런 식의 반응은 실제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은 물론, 그들에게 자신의 어려움과 괴로움이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기도 힘들 뿐입니다.

일단은 그들을 괴롭히는 기억이 무엇인지 파악했다면, 그 기억을 촉발할 수 있는 요인들, 예를 들면 특정한 장소나 물건, 사람이나 행동 등을 피하거나 차단하도록 신경 쓸 필요가 있습니다. 

앞선 정민이 사례의 경우에 한동안은 사고가 발생했던 동네 공원은 물론, 사고를 떠올리게 할 만한 다른 공원에도 가지 않는 것이 정민이의 괴로운 기억을 불러일으키거나 불안감을 자극하지 않도록 돕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노란색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것을 미리 발견했다면 정민이가 그 오토바이를 보지 못하도록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이미 봤다면 정민이의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어떻게 도우면 좋을지 물어봐 주면서 곁에서 안심시켜 주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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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특별한 촉발 자극이 없고 평범한 일상에서 정민이가 더 이상 공원에서의 사고 기억을 괴로워하며 떠올리지 않고, 기억이 차차 희미해져서 어느 정도 안정감을 되찾았다고 판단될 때, 공원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긍정적인 기억으로 바꿔 주기 위한 시도를 해 볼 만합니다. 

이를테면, 과거에 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추억을 이야기해 보거나 공원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함께 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공원에서 근사한 파티를 계획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정민이가 다시 공원에 가기 위한 용기를 내는 데 가족들이 어떤 도움을 주면 좋을지, 또 바라는 것은 없는지 등등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도 좋습니다. 단, 정민이가 다시 공원에 갈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강요하지 않으면서 느긋하게 기다려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안 좋은 기억을 좀 더 편안하고 좋은 기억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은 비단 자폐증이 있는 분들에게만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적용해 볼 수 있는 일상생활의 지혜로 삼으신다면 좋겠습니다. 다만, 자폐증이 있는 분들에게는 주변 분들의 좀 더 섬세한 도움과 충분한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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